'감정의 물성'을 읽고

2020년 10월 20일에 쓴 독후감

by 잔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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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길에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바람에 들고 왔던 소설집을 지하철에서 후루룩 읽었다. 그런데 그중에도 방금 읽은 ‘감정의 물성’에 더 감흥이 생기는 건 책을 읽던 시간대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단편집의 내용이 내게 다른 것보다 와닿아서일까.�



‘감정의 물성’은 동명의 상품에 관한 이야기이다. 갖고만 있어도 그 감정이 생긴다는 상품, 그 감정의 이름이 붙은 상품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공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행복, 편안함, 차분함 같은 감정들이 팔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행복해지는 걸 바랄테니까.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우울이나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날개 돋힌 듯 팔리는 것인가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도, 우울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텐데.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게 바로 주인공의 연인인 보현과 감정의 물성을 팔았던 브랜드, 이모셔널 솔리드의 대표이다.


우울이나 증오를 사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전에도 우울이나 증오와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구매해왔듯, 이번에는 그것을 그대로 물성으로서 구매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로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 질문과 답변이 조각조각 쪼개어 머리에 흩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다. 머릿속을 말끔히 정리해볼까 했으나... 그것이 그렇게 필요한 일일까? 이 혼란스러움이 바로 오늘의 여운은 아닐까? 어차피 소설을 머리로 이해하는 건 비평에서나 해야 할 일이지 독후감에서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느낀 그대로 대답할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내면서 나는 보현을 생각한다. ‘우울체’를 집안에 한가득 놓아두었던 보현을 말이다.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217p 중


나는 보현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그러니 나는 만약 내가 ‘우울체’를 샀다면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감정의 ‘물성’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감정이 물성을 가진다면 나는 내가 가진 감정이 실체를 가졌다는 것에 안도할지도 모르겠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긁어낼 수도 있고 부드럽게 쓰다듬을 수 있다는 건 안심을 갖게 한다. 나를 짓눌렀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제는 보이게 된다면, 그러면 조금은 두려움을 버리지 않을까. 내가 느끼던 감정이 허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언어로 옮기고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안심시키지 않을까.


다시 보현의 말을 읽는다. 보현이 하는 일은 자신의 우울을 자신 밖으로 빼냈다가 다시 들여놓는 과정이다. 우울을 사고, 그 우울을 만지고, 다시 그 우울을 섭취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소화하는 일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젠 다시 이모셔널 솔리드 대표의 말을 읽는다. 우울을 샀던 사례를 생각한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우산을 쓰지 않고 1시간 반을 걸어오던 날을 생각한다. 그 날에는 울고 싶었고, 울지 못하니 그대로 1시간 반을 내리 걸었다. 누구에게나 펑펑 울고 싶은 날이, 순수한 분노로 베개맡에 주먹질하고 싶은 날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규범도,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성도 없이 오로지 감정으로만 굴고 싶은 날이 있다. 한 번 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런 날이 된다면 그날엔 나도 충동적으로 우울체나 증오체를 구매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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