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실재론의 지식관과 교육

by Lanie

신교육사회학자들은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가 학생들의 상대적 교육 성취 수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즉 지식의 구성과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Moore, 2013). 그리고 연구 결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 즉 교육과정의 선정과 조직 이면에는 사회적 지배계급(중산층, 남성, 백인 등)의 이해관계 및 주류 문화가 반영되어 있으며,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작용, 즉 교수법에 있어서도 중산층의 교사들이 소유한 문화자본에 따라 사회구조의 권력과 헤게모니가 반영된다고 밝혔다(김영화, 2010). 즉, 이들은 학교 내의 교육과정의 선정과 조직에서 불평등 재생산의 원리를 찾아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절대적 지식이라고 알고 배우는 것은 특정 계급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타파하고자 교육과정과 학교현장에는 상대주의적 지식관과 수업 방식이 검토되기 시작되었다. 상대주의 지식관은 지식이나 진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입장으로, 지식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며 고정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확실하다는 절대주의의 지식관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이성회, 2021).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기조는 쉽게 공감을 샀다. 그래서 최근 교육과정 및 학교 현장에서는 지식교육을 마치 산업시대의 산물로서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이라고 치부하고, “지식 위주의 암기식 교육에서 배움을 즐기는 행복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교육부 보도자료, 2015.9.23.; 이성회, 2021). “아이들에게 길러줘야 하는 것은 학력이 아닌 ‘살아가는’ 능력이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학습 안내자, 학생 성장지원 전문가, 상담자가 되어야 한다(경향신문, 2021)”, “인터넷이 모든 지식과 정보를 쉽게 알려주는 21세기에, 지식의 시대는 지나갔고, 역량의 시대가 왔다”와 같은 어구가 사회 전반에 걸쳐 지식교육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다(김승호, 2018). 이에 따라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한 학생중심의 역량기반 교육과정 정책으로 인해 지난 수년간 지식을 공부하지 않고 흥미 위주의 활동을 나누는 수많은 학교의 수업이 각광받는 분위기가 일었다(이성회, 2021).


역량기반 교육과정에는 학생들의 학력 저하 문제가 같이 따라온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러한 흐름을 10년가량 먼저 따랐던 영국에서도 같은 흐름이 일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량기반 교육과정이 학력저하와 분명하고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역량기반 교육과정과 학력저하는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이성회, 2021). 학력이 좀 저하되면 어떠냐, 학생들이 행복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막상 학생들조차 이러한 수업을 반기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부 학생들은 오히려 공허함과 진부함을 느끼고 있기도 하며 차라리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기도 한다(이성회, 2021).


절대주의적 지식관에 기반한 지식 교육이나 상대주의적 지식관에 기반한 역량 교육이나 모두 한계를 보인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학교와 교사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둘을 상호 보완하는 정반합의 대안으로 ‘사회적 실재론(social realism)’에 의한 지식관이 제안된다. 즉, 절대주의적 지식관은 학문적 경계는 정해져 있고 고정적이라고 한다면, 상대주의적 지식관은 경계의 종말을 고하는데, 사회적 실재론의 지식관에서는 학문적 경계들이 물론 인정되고 유지되지만, 또한 새로운 지식의 창출과 습득을 위해 횡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지구는 평평하다’가 절대적 진리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고 오랜 기간 여러 학자들의 이런저런 증명을 거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절대주의적 지식관에 의하면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점은 변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상대주의적 지식관에 의하면 누군가 ‘지구는 둥글다’라고 했을 때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지구는 평평할 수도, 둥글 수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하다고 받아들여졌던 옛 지식이, 학문적인 수정 절차를 거쳐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사회적 실재론적 지식관이다. 우리는 그동안 실제로 이런 절차에 따라 지식을 구성해왔다.


사회적 실재론에 의한 지식의 구성 절차를 잘 표현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철학 자체가 지식을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할 때, 바디우는 상대주의적 철학자들은 철학하기를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동굴에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그 빛을 발견한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구멍을 통해 동굴 밖으로 나갈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알아냈다면 그 자는 동굴로 돌아와 동굴 안의 다른 사람들도 동굴을 탈출할 수 있도록 출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동굴 밖으로 나갈 방법과, 모두가 나갈 수 있는 출구를 고안하는 일은 쉽고 단순한 절차는 아니다. 이 고단하면서도 철저한 절차를 바디우는 ‘충실’의 과정이라고 한다. 즉, 바디우에 따르면 ‘충실’은 탐색 활동을 성실하게 배반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하는 활동으로, 바디우를 연구한 목영해(2019)는 이러한 바디우의 ‘충실’의 개념을 구성주의의 극단적 상대주의를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도 많은 학자들이 충실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실재론적 지식관에 의한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주의적 지식관은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들을 무력화한다. 또한 교육에 있어서도 위험성을 내포한다. 모든 지식과 모든 의견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가르침과 배움의 필요성을 무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예로 생각해볼 때, 우리 대부분은 아름다운 음악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다. 기괴한 현대음악을 듣고 ‘새롭다’고 느낄 수 있지만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1750)가 규정하고 수많은 음악인들과 대중들이 인정하고 약속한 평균율에 의한 12 음계에 기반한 화성학 이론을 기반으로 쓰인 음악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음악,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이 사실상 18세기 유럽 귀족, 즉 특정 시대의 특정 지역의 특정 계급이 향유한 음악이며, 대다수가 즐기는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이 학교에서 경시되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이런 특정 시대 특정 지역 특정 계급의 음악을 주입하지 말라고 한다면, 올바른 창법과 주법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리든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배울 게 없는 것이다. 그냥 저마다 마음대로 소리치고 아무거나 두드리고 놀도록 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하고, 모두가 정답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즐거울 수도 있겠으나 지식에 대한 공허를 느낄 수 있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듯 우리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발견으로 구성된, 우리의 앎의 한계로 경계지어진 사회라는 동굴 속에 있다. 상대주의적 지식관은 절대주의적 지식관이 동굴의 세계를 공고화하기만 한다고 보지만, 오히려 상대주의적 지식관에서는 적절한 배움과 공부가 일어나지 않아 동굴 속으로 자기 속으로 더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적절한 지식에 대한 배움과 공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고 공부하기에 합당한 지식을 사회적 실재론에서는 ‘강력한 지식(powerful knowledge)’이라고 한다.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절대주의적 지식관에서는 지배적인 지적 전통이나 규범으로의 유도, 상대주의적 지식관에서는 학습하는 방법에 대한 학습과 삶과 일에 대한 학습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사회적 실재론에서는 이 강력한 지식의 습득을 교육의 목적으로 본다. 따라서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지식의 구조, 형식과 개념을 담아야 하며, 그 내용이 변할지라도 모든 학문과 지식이 동등한 것은 아니고 분명히 그 간에 이론적 지식과 일상적 지식이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최고 지성인으로 불릴 수 있는 한 사람이 대중매체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학교 교실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동네 형들에게서 배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의 교과는 ‘동네 형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만’을 가르치기 위한 곳이 아니라 ‘동네 형들에게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내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닐까? 적어도 개개인의 인생의 목적이 단순히 먹고 자고 쾌락을 느끼고 생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만들고자 노력하는 데에 있다면 말이다.



참고문헌


경향신문(2021).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수능 킬러 문항 탓 사교육 성행...서술형, 논술형 시험

도입 고민할 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102030600005

(검색일: 2023.12.02.).

교육부(2015).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 및 각론 확정 발표(보도자료 201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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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기(Chul-Ki Cho)(2014). 영국 국가지리교육과정 개정과 지식 논쟁. 대한지리학회지, 49(3), 456-471.

Moore, R(2013). social realism and the problem of the problem of knowledge in the sociology

of education.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of Education, 34(3), 33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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