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 떠나기 전(혹은 쓰기 전)의 상념들

(0) 서울

by Lanie

내가 감히 에세이를 써도 될까?


에세이에 최적화된 플랫폼인 "브런치" 작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에세이"를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 내 글들은 뭐랄까, 에세이라기엔 너무 학문적이고, 학문적이라기엔 너무 개인이 많이 섞여 들어가 있고, 칼럼이라기엔 그리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애매한 장르들이다. "서론까지밖에 쓰지 못한 논문" 이라기엔 논문에 싣지 못할 문장도 많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것은 에세이이다. 에세이는 쉽게 쓰이는 글 같기도 하지만, 그만큼 더 용기가 필요한 글인 거 같다. 논문에 쓰이는 문장들은 논리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들을 빌린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온전한 자기 뇌피셜은 자신이 없고,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니까 반박하지 말라는 듯이 인용표기를 한다. 그래서 가끔은 인용표기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 반해 에세이는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으로 덜 비겁하다.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온전한 감상들을 세상에 그대로 꺼내놓는 일. 자기 연민에 빠져 있고,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유치하기 그지없는(적어도 나는 그렇기에.)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일. 아무 화장의 힘도 빌리지 않고 맨 얼굴 그대로 외출하는 일.


돌아보니 제도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그 부끄러운 일을 하기 위해 겉보기에라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 하찮은 나의 내면을 읽고 "그러니까 저렇게 살지."라고 할까 봐, "오, 저런 사람도 내면은 다 그렇구나."라고 할 수 있도록.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쓰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은 누르지 못해 여행을 빌미로 이제는 에세이를 한 번 써보려고 한다. 지난 한 3개월 간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리고 상상한 것은 쓰고 싶은, 쓰게 될지도 모를 문장들이었다.


약 17일간 자리를 비우기 위해 현실의 과업들을 미리미리 해놓느라 정말 분주하게 보낸 나날들이었다. 고작 그 여행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지. 여행을 포기할까 싶기도 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결국은 이 여행을 지켜내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주가 되었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나는 목요일까지도 여럿 과제들을 아직 앞두고 있지만, 이번 주 금요일이면 나는 분명히 공항에 가고, 비행기에 오르고, 먼 이국 땅에 닿아 있을 것이다.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늘 저녁에 있을 발표 준비를 하다가 브런치에서 이렇게 딴짓을 한다.


여전히 마음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행을 포기했다면 이 시기가 훨씬 마음이 편하고 여유있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어짜피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이런 삶은 대학원생의 숙명이 아닌가! 물론 죄책감은 좀 덜하겠지만, 어쩌면 나는 그 죄책감을 동력 삼아 더 열심히 살아낸 것 같기도 하다(라고 벌써부터 합리화를 시작한다.).


아무튼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이 꼭 있어야만 했던 것일지는 앞으로의 글들에서 밝혀지게 되겠지. 아니 아마 그 불편한만큼이나 이 여행의 의미를 중대한 것으로다가 굳이 굳이 찾으려 집착하겠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