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혜윰 Apr 14. 2024

용기

나를 마주하는 힘

스스로 생각했을 때 당신이 가장 멋있었던 순간은?




2019년 겨울,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 공채로 합격했어요. 그곳에는 3개월 동안 수습기간을 보낸 후 두 차례 평가와 임원 PT를 합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입사 절차가 있었어요.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처음으로 공채가 열린 것이라 저희 기수는 회사 내에서도 관심이 집중되었고 유난히 동기들이 많아 부러움을 사기도 했어요.


합격의 기쁨도 잠시, 코로나가 터졌고 1차 평가가 이루어졌던 한 달 만에 동기들의 절반이 권고사직을 통보받았습니다. 20명이 넘었던 동기들 중 임원 PT 발표까지 통과한 사람은 고작 5명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절반은 발표를 하더라도 입사가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발표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때도 칠판 앞에 서면 온몸이 떨렸고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목소리는 염소처럼 진동했고 머리는 새하얘지며 식은땀이 흐르곤 했어요. 그런 저에게 임원 발표는 가혹한 미션이었어요. 발표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합격해서 정규직으로 입사하자라는 간절함이 더 컸어요. 발표 한 달 전부터 매일 같이 대본을 자연스럽게 다듬었고 주말에는 회의실을 빌려 발표 연습을 했어요. 스스로 녹화해 보고 선배들에게 피드백도 부탁했어요. 준비하는 동안 저는 제 자신과 싸우는 기분이었어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 너무 부끄러웠고 덜덜 떠는 목소리에 창피했거든요. 발표 전날까지도 머리가 백지장이 되더라도 술술 나올 정도로 연습했어요. 자연스러운 제스처, 정돈된 스토리, 또렷한 목소리와 걸음걸이까지 연습만이 살길이라 믿으며 저의 시간을 축적했어요.


그리고 임원 PT 당일, 대회의실에는 40여 명이 되는 임원진이 모여있었고 저는 마지막 발표자로 호명되었습니다. 가운데 앉아계신 대표님과 눈이 마주쳤고 저는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심호흡을 한 번 내뱉고 준비했던 모든 걸, 실수만 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쏟았어요. 숨 막히는 20분이 지나고 감사인사로 발표를 마쳤어요. 제 귀에는 큰 박수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고 대표님을 비롯한 모두가 저를 보며 웃고 계셨어요.


“혜윰씨는 원래 발표를 잘하나? 앞으로 회사 발표는 혜윰씨가 맡아야겠는데? 인재가 있었네.”


대표님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어요. 사실 저는 아직까지도 제가 어떻게 발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모습이 제가 발표 직전에 녹화해 둔 영상과 흡사하다면, 저는 박수받아도 될 정도로 멋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발표를 못한다고 가둬놓았던 세상에서 찬란한 빛을 본 것 같았어요. ‘나도 할 수 있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구나’라는 추상적인 생각들이 눈앞에 결과물로 나타나니 정말 뿌듯하고 값진 시간이었어요. 입사 후 저는 퇴사할 때까지 발표 천재로 불렸어요. 저는 아마 앞으로도 힘든 일이 닥칠 때,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 04화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