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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Nov 01. 2024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2024 요코하마 마라톤

요코하마는 정말 멋진 도시였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사옥들이 몇 블록이나 줄지어 있었습니다. 잘 정비된 공원들과, 고급 상점들도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길은 대체로 널찍널찍했으며 길을 거니는 사람들은 젊고 세련된 느낌이었습니다. 도시 한 편에는 개항시기의 건물들이 아직도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습니다. '나폴리탄'이라는 일본식 파스타를 처음 만든 식당도 포함해서 말이죠. 골목을 꺾을 때마다 바뀌는 시퀀스. 지루할 틈 없이 변주되는 풍광에 내내 즐거웠습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랜드마크 빌딩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야경도 황홀했습니다. 마침 재팬시리즈 2차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야구장의 라이트는 요코하마 밤하늘 아래 가장 빛나고 있었습니다. 선명하게 보이는 파란 유니폼들의 함성이 멀리까지 들리는 듯했지만, 아쉽게도 그날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도시는 처음 이었습니다.]

9개의 조로 나뉘어 출발한 마라톤은 그야말로 사람의 산, 사람의 파도였습니다.  한적하던 8차선 도로가 주자들로 가득 찼고, 한참 동안을 사람을 피하며 달려야 했습니다. 대회 준비는 아주 촘촘하게 되어 있었는데 급수대와 보급은 2~3킬로미터 지점마다 있었고, 간이 화장실도 주로 전역에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5킬로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고적대, 치어리딩, 벨리댄스까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간바레를 외쳐주었습니다. 급수대마다 준비된 간식들도 무척 다양했습니다. 젤리, 양갱, 오니기리, 초밥, 모나카, 모찌, 각종 종류의 달달한 사탕들까지. 다음 급수대에선 어떤 간식이 나올까 하는 상상이 지루함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많은 순간들이 아쉽습니다]

사실 직전의 경주 마라톤에서 조금 실망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 기록을 경신해 왔었는데, 올해의 타깃으로 삼았던 경주대회에서는 목표보다 10분이나 저조한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쳤었습니다. '충분히 열심히 훈련하지 않았다'가 가장 주된 원인이었겠지만, 원래 사람은 인풋보다 좋은 아웃풋을 희망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경주마라톤을 마치고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뛰는 대회였고 오른쪽 발바닥 쪽의 부기도 다 빠지지 않았던 상황이어서 그냥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섰습니다. 레이스가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이 밀리는 상황이 이어졌고 덕분에 조금 남아있던 욕심까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연도를 가득 채운 분들에게 엄지를 들어 인사를 하기도 하고, 급수대에선 아예 멈춰 서서 간식도 챙겨 먹었습니다. 생맥주 모양의 탈을 쓰고 뛰던 분에게는 '나마비루 간바레!'라고 외쳐주기도 했었습니다. 매번 죽기 직전쯤에야 끝나던 레이스가 이번에는 여행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풍경, 어떤 사람이 있을지, 피니시에서는 어떤 포즈로 들어갈지, 즐거운 상상들이 연이어 에너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맨 뒤쪽 조에서 출발한 덕분에 내내 누군가를 추월하며 달리는 것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최소 일만 명 이상은 추월한 거 같은데, 따라 잡히는 것보다는 확실히 기분 좋았습니다. 

[일본의 페이스 메이커는 작은 풍선을 모자에 부착하고 달렸습니다]

고가도로를 한 참 달리고 다시 지상의 도로로 내려오자 'Nice run'이라 적힌 피켓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큰 소리로 '나이스 런'이라고 외쳐주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왠지 골프의 '나이스 샷'이 연상되는 멘트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3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려오느라 자세도 무너지고 페이스도 떨어져 버린 시점에 실제로 나이스한 달리기는 아니었을 텐데, 힘든 레이스를 버텨낸 모든 사람들에게 참 잘했다. 훌륭하다. 멋지다. 칭찬을 해주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모두가 나이스 할 수 있는 달리기라니.  빨라지지 못해 속상했었던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녹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한 말들을 곱씹으며 달리다 보니 울컥하며 얼굴 쪽으로 눈물이 확 올라왔습니다. 얼굴에 혈압이 높아지고 심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습니다. 예전엔 피니시가 가까워 오면 자주 느끼던 마음인데. 글을 쓰며 돌이켜 보니 올해는 처음 느끼는 벅참이었습니다. 울음과 함께 무언가 풀려나가는 그 느낌이 좋아서 부끄럽지 울면서 달린 적도 몇 번이나 있었는데 말이죠. 


저도 '나이스 런'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 졌습니다. 올 한 해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1등이 아니라도. 예전 같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2024년을 잘 살아내셨다고. 한 해의 힘든 레이스도 피니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박수와 함께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나이스 런!' 


'수퍼맨!' 


'나이스 런!!'

[전날 쌩쌩한 표정으로 미리 피니시 사진을 찍어두길 잘한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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