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밥을 사겠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이렇게 환하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이것저것 골라봐.
비싼 걸로 먹어.
천천히 많이 먹어.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으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았다. 별 말 아닌 것 같은데 마음이 순식간에 덥혀지는 말. 자주 하지 못했다. 한번 사줄 때 제대로 사주면 좋을 것을, 속으로 궁색하게 굴었다.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일텐데. 돈은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이라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늘 그릇에 속는다. 성탄 선물로 서로에게 책을 한 권씩 사주고 헤어지기로. 그와는 늘 만나면 서점에 가고, 서로에게 책을 선물한다. 긴 세월 그와 내가 만든 작은 문화다. 서점을 둘러보다가 선물할 책을 골라 계산하려 할 때, 그가 다드림 서비스로 이미 결재해두었다고 바코드 찍고 책을 건넨다. 그는 그렇게 내게 다 드리고 홀연히 갔다. 마치 산타처럼.
그에게 받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하루쯤 자유이용권을 선물하고 싶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비싼 걸로 골라. 세트메뉴로 하자. 그걸 왜 네가 다 사냐고 미안해하는 너를 납득시킬 방법을 고민해본다. 짱구를 굴려봐도 반짝이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현실에서 안된다면 상상을 이용하자. 어젯밤 꿈에서 네가 맛있는 걸 실컷 사줬다고 해야지. 선물도 사주고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집에까지 데려다줬다고 해야지. 그러면 너는 어떤 표정일까. 이쪽 삶이 꿈인지, 저쪽이 꿈인지 알 수 없는 꿈같은 하루인 걸로 치고. 한번에 하루치만 진하게 살아보기로 하고. 하루쯤은 너랑 돈 걱정, 미래 걱정, 내일 걱정, 내년 걱정 다 내팽겨치고 프랑스 사람처럼 한 세 시간정도 천천히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많이 웃고 싶다고 해야지. 그럼 너는 그제야 내 마음을 읽고 못 이기는 척 나랑 놀아줄까. 우리 하루쯤은 그래도 되지 않나? 한 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하루 통으로 아무 생각없이 맛있는 거 먹고 좀 놀면 안되나?
북클럽 수업에서 멤버분들과 이런 약속을 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12월에는 꼭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고. 내 생이 1년 남았다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한 통의 편지가 유서처럼 보내질 것이고, 30년 남았다면 30개의 사랑이 날아가겠지.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핑클의 '약속해 줘'를 떠올리며 수줍게 애끼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예뻤다. 그들이 오래도록 그 약속을 잊지 않기를. 무엇보다 그 말을 꺼낸 내가 12월이면 편지지를 꺼내들고 편지 쓰기를 멈추지 않기를. 이 글을 쓰며 또 하나의 애끼 손가락을 올려본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12월에는 사랑하는 이에게 프랑스 스타일의 식사를 선물하기로 한다. 비싼 걸로 먹어, 라는 말을 꼭 해 봐야지. 천천히 많이 먹으라고 해야지. 해마다 12월 하루쯤은, 나도 누군가에게 프랑스 출신 산타할머니가 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