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5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p.155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최진영, <단 한 사람> 중에서...
이런 순간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좋아하는' 책에 '좋은' 문장을 알려줬을 때. 서둘러 페이지를 넘겨 그 문장을 짚어보다가 나도 그 문장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 좋아하는 것들과 새끼 손가락을 거는 그런 순간. 그 순간은, 책을 읽는 어떤 순간보다 더 '좋아요.' 혼자였다가 둘이 되는 느낌. 벨도 누르지 않고 내 가슴 속으로 다섯 걸음은 걸어 들어온 느낌. 어떤 마음은 시작이 없지요. 노크도 하지 않고 스며들지요.
제가 좋아하는 강가희작가님이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하고 저희 학인들의 모임에서 말씀해 주셨어요. 저는 그쪽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허겁지겁 100페이지대로 헤엄쳐 나갔지요. 그렇게 만난 사랑을 담은 귀한 문장. 깊이 사색하게 하는 소중한 문장. 최진영만의 사랑법. 그 슬프지만 아름다운 법칙을 마음으로 헤아려 보았지요.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사람 자체가 '신'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시작도 끝도 없고 가까이와 멀리에 상관없는. 그건 영원과 무한의 이야기, 즉 '신'을 뜻하는 게 아닐는지요.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라는 문장을 통해서도 알아졌지요. 사랑이 아닐 때 우리는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일 뿐이지만, 사랑의 상태일 때, 비로소 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인간'이 기본값이 아니라 '신'이 기본값이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면 신이 된다는 걸. 사랑하면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할 순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남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으로 국한하지 않는다면 우리 매 순간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누구든 세상 한 명쯤은 애틋해하잖아요. 가족과 친구들, 가까운 지인들... 그들이 행복하길, 몸 마음 아프지 않길 염려하고 있잖아요. 반려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마음씀도 사랑이지요. 때로 계절의 절정에 우리는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하기도 하지요. 저녁노을만 봐도 숨이 멎을 것처럼 아름다워서 멈춰 설 때가 있잖아요. 그때의 그 멈춤. 그것도 자연에 대한 사랑 아닐까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랑인지 누가 정해준 적이 없으니 내가 나만의 '사랑의 범위'를 확장해 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요.
사랑, 끝은 없겠죠. 기억 이전에 시작된 걸요.
사랑을 기본값으로, 나침판으로 그렇게 살아보아요.
설령 길을 벗어나더라도, 헤매더라도
멈추고 오늘, 지금, 다시 사랑 쪽으로 딱 한 걸음만 더 내디뎌 보아요.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최진영, <단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