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 때의 경험을 발판 삼아 가족 모두가 아닌, 형제 모두가 아닌, 아이와 나 둘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큰 아이는 강화도와 부산을 뚜벅뚜벅 걸어다녔는데 작은 아이와는 강릉을 가기로 했다. 2014년의 강화도는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다니긴 무척 힘들었지만 덕분에 사소하고 소중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근 10년이 젊었고 큰 아이는 작은 아이보다 잘 걸어다녔던 터라 이번 여행의 목적지로는 고려하지 않았다. 부산은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는 대도시였지만 너무 멀고 복잡해서 새롭게 시도한 곳이 강릉이었다.
강릉은 가족 여행으로 적지 않게 다녀왔다. 남편 직장 수련원에 숙박하면 숙박비가 들지 않거니와 볼거리가 많은 고장이라 수련원만 당첨이 된다면 수시로 다녀왔고, 올초에도 호텔 타령을 하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한 번 다녀왔었다. 그래도 둘이 오는 건 처음이니 새로운 마음이 들었다. 5월의 강릉 바다에 발을 담글 계획은 없고 차가 없이 다녀야 하는 터라 짐을 최소화하여 둘이 떠났다. 가슴에 설렘을 빵빵하게 채우고 떠난 강릉 여행은 숙소의 초라함이나 대중교통이 불편함을 모두 상쇄시킬만큼 좋았다. 우리는 내내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어하며 3박 4일을 여유롭고 행복하게 보냈다.
코스를 일일이 짚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강릉은 관광지라 그에 관한 책들이 적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첫번째로 느낀 것은 인심이었다. 이 글 바로 직전에 쓴 글이 '포켓몬빵'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때 아이는 처음 맛본 포켓몬빵과 띠부씰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편의점을 들어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강릉역에서 내려 공중전화를 체험해보려고 동전을 바꾸러 들른 편의점에서 아이가 대뜸 "포켓몬빵 있어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주인 아주머니는 "없다."고 말했지만 딱 자르진 않고 "왜?"라고 여지를 남겨두셨고, 아이는 "포켓몬빵 먹고 싶다"고 아주머니의 마음을 자극했다. 처음엔 없다던 아주머니는 구석 검은 봉지 안에서 그 맛있다던 포켓몬 초코롤빵을 꺼내주셨고 아이는 눈이 동그라지면서 행복해했다.
아이를 어여삐 바라봐주신 편의점 사장님들, 감사해요!
서울에선 "없다."는 말에는 여지가 없었는데 사소하지만 낯선 그리고 따뜻한 경험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는 이때를 발판 삼아 들른 편의점마다 물어봤지만 한두 군데를 빼고는 검은 봉지에서 꺼내주셨다. 이유는 모두 비슷했다. 달라는 사람이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나 청소년들이 띠부씰로 돈벌이를 하려고 묻는 것보단 아이가 순전히 빵을 맛보고 스티커를 모으는 마음을 어여삐 보는 것이리라. 서울에서는 그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검은 봉지는 단골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쌀쌀맞은 대답 뿐이었는데 그분들을 바라보는 내 눈에 어느샌가 애정이 생겼다. 아이는 강릉에 머물면서 편의점 사장님들이 보여주신 환대에 5번이나 극도의 기쁨을 누렸다. 우리가 차로 이동했다면 이런 재미가 있었을까? 이런 인심을 느낄 수 있었을까? 예상하지 못한 행복의 샘물에 우리는 내내 강릉을 좋아했다. 서울에 돌아와 한 번 아이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마음은 가르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다.
숙소는 안목해변 부근이어서 걸어서 터덜터덜 가면 10분이면 도착했다. 아이는 이때 골목길을 처음 경험했다. 우리가 어릴 때 딱지치기하고 고무줄 놀이하던 그 골목길 말이다. 그때의 골목길보다 훨씬 정갈한 안목의 골목길 풍경에 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았는데 아이는 적막과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다. 그때 찍은 사진에 아이는 어깨에 긴장이 한 가득이다. 사진을 찍고 엄마 어릴 적 골목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질러가는 맛을 느낀 후에야 긴장이 내려간 듯 하다. 안목해변은 카페 거리로 유명하고 어느 카페에 앉아도 풍경이 아름답다. 거닐어도 좋고 바라봐도 좋았다. 고요한 밤바다를 기대하고 나간 밤산책은 북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소리들로 붐볐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대신 우리는 좀더 안전하게 밤바다를 거닐었다. 안목해변은 10년 전의 한적한 장소가 아니라 연인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어버렸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곳에서도 포켓몬빵을 얻어 우리는 연인들보다 더 행복했다. 결국 장소는 함께 하는 사람과 그 사람과 만들어낸 사건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안목해변은 유명한 관광지라는 타이틀과 무관하게 우리에겐 소박하고 정다운 장소였다.
여행의 컨셉을 정하지도 않고 그저 되는대로, 귀찮으면 동네나 거닐자는 마음으로, 그저 둘만 떠난다는 목표를 가지고 떠난 '느린 여행'이었다.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더 좋은 게 '느린 여행'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의 우리 마음에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니 평소 조금만 걸어도 찡찡대던 아이는 씩씩하게 함께 걸어다녔다. 그런 제가 저도 기특한지 "엄마 나 진짜 잘 걷지? 살 빠지는 거 아닐까?"와 같은 실없는 말들을 자주자주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엄청 든든하다."며 치켜세워가며 우리는 내내 웃었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지도 않고, 멋진 장소에 많이 가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눈과 마음은 풍요로웠다.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시내를 갈지 바다를 갈지 정하라는 나의 제안에 아이는 바다를 원했다. 올라가는 길에 강문해변을 들러 해변가의 북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발을 담그려는 계획도 없었고 거닐기엔 햇볕이 뜨거워 2시간여를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있었다. 좀 거닐까 제안을 했더니 아이가 수락을 했고 카페에 양해를 구해 짐을 좀 맡긴 후 가볍게 산책을 했는데, 그만 아이가 물놀이를 시작했다. 아직은 차가워 무릎 아래까지만 담그고 모래놀이 중심이었지만 어쨌든 짐도 다 싼 마당에 이럴 줄은 몰랐다. 문득, 큰 아이와 부산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해운대에서 아이는 2시간여 해수욕을 했었다. 바캉스 시즌이었고 혹시 몰라 버려도 될 수영복을 챙겨간 터였다. 그때 아이는 정말 행복해했고, 처음으로 남자 탈의실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었다. 경계심이 많은 둘째 아이가 자신을 내려놓고 물에 다리를 담그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이 순간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안 입은 여벌옷을 떠올리며 아이를 내버려두었다. 2시간여를 놀고 난 후 온 몸의 모래를 털어내고 방파제와 데크를 통해 모래 한 톨 없이 카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었고 강문해변에서 그게 가능했다. 얼마나 고마운 바다인가, 이곳을 오지 않았더라면 이 시간을 못 누렸을 테고 다른 바다였다면 임파서블한 미션을 이렇게 깨끗하게 수행하지 못했을 거라며 나의 행운에 감사했다.
강문해변 방파제쪽 얕은 곳은 다음 여행에도 꼭 놀아야지 하는 구역이 되었다.
카페 화장실에서 옷을 싹 갈아입고 강릉역에 도착해 떠날 시간을 기다렸다. 어리석게도 연휴 전날이라는 것을 잊고 표를 예매 못해서 장장 4시간이나 비었지만 그 또한 우리는 아무 이동없이 강릉역에서 즐겁게 보냈다. 2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체험학습보고서도 쓰고 가져갔지만 하지 못했던 만들기며 스티커를 그곳에서 다 했다. 물론 강릉역에 오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포켓몬빵도 하나 또 얻었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게 없던 3박 4일이다. 이건 정말 행운일까? 요즘 아이가 읽는 요시타케 신스케의 '이게 정말' 시리즈를 떠올리자면 이건 정말 행운이기도 하고, 이건 정말 마음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을 하며 다음 여행을 기대한다. 이게 정말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