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중년 남자들의 정체성 혼란은 심각하다. 한국 남자들에게 번듯한 명함이 사라지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일은 없다. 고령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여 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김정운 작가는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 이렇게 썼다. 남자는 아니지만, 오랜 직장 생활의 마무리를 앞둔 지금의 나에게 이 문장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짧은 첫 직장과 두 번째 직장 사이에 약 다섯 달의 공백기가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전까지 나는 “어느 중학교, 어느 고등학교, 어느 대학교 무슨 과”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왔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 모든 소속이 사라졌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불안이었다. 나를 설명해 줄 말이 없다는 사실, 소속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사람을 위축되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다행히 몇 달 뒤 나는 대기업 직원이 되었고, 이후 30년 동안 “어느 회사에 다니는 누구”로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소속이 없는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퇴직을 앞둔 나의 두려움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30년 동안 “어느 회사 다니는 누구”로 살아온 내가, “어느 회사”가 사라지는 순간,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하게 될까.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스스로를 관찰하며 자주 자문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뭘까? 아무도 시키지 않고, 돈이 되지 않아도 내가 기꺼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앞으로 주어진 30년을 나는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 걸까?"
그 질문 끝에 몇 년 전, 세 가지 키워드를 찾았다. 책, 주식, 그리고 창업.
어릴 적부터 나는 책 읽는 아이였다. 아버지가 사주신 동화책과 위인전집을 형제자매들이 거의 펼쳐보지 않을 때도,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기를 썼고, 초·중·고 시절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목적이 있어서 읽은 건 아니었다. 그냥 좋았다. 어떤 날은 책을 읽고 감정이 벅차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대학과 직장 생활을 거치며 책과 잠시 멀어졌지만, 시간이 조금 생기자 다시 자연스럽게 책으로 돌아왔다. 한달에 한 번 회사의 조기퇴근 날이면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였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휴식이었다.
입사 초기에 한 달간의 합숙 교육을 마치고 각자의 꿈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말한 꿈은 “책을 한 권 쓰고 싶다”였다. 다른 사람들의 발표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말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그 꿈을 실천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해서 돈이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책 읽기와 글쓰기는 인생 2막에서 무료해질 수 있는 시간을 단단하게 채워줄 취미가 될 것이다. 비용도 거의 들지 않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도 적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흩어져 있던 생각과 감정을 문장으로 정리하게 해 준다. 생각이 정돈되는 순간 특유의 개운함과 작은 성취감이 생기고, 그렇게 쌓인 기록들은 묘한 든든함으로 남는다.
은퇴 후 창업만큼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당장 옆에 있는 남편 역시 어떻게든 내 창업 의지를 꺾으려 애쓴다. 솔직히 나 역시 안다. 창업을 하게 되면 언젠가 “도대체 내가 왜 이걸 시작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라며 후회할 날이 올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큰 회한이 남을 것 같았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그래도 한 번은 부딪쳐 보고 싶었다. 물론 이 나이에 유니콘 기업을 꿈꾸는 건 아니다. 내가 지향하는 건 ‘슬로 창업’이다. 최대한 작게 시작해 리스크를 줄이고, 속도를 낮춰 경험을 쌓아가는 방식이다.
운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차를 모는 건지 차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운전을 하고 나면 온몸이 굳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자가 운전자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자 차와 내가 한 몸이 된 듯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제야 운전이 즐거워졌다.
지금의 나는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심정에 가깝다. 세상의 모든 창업자들이 대단해 보인다. 부디 몇 년 후에는, 창업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식 투자는 30대 초반에 시작했지만, 회사 일에 치이다 보니 계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중단했었다. 몇 년 전 다시 시작하면서 코로나 폭등장과 그 이후의 폭락장을 모두 경험했다. 그 시간을 지나며 가격 변동에 대한 마음의 근육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이제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IRP, 개인연금, 퇴직금 계좌를 직접 관리해야 하고, 이 계좌들을 예금만으로 채워둘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퇴직 후 사라질 월급을 대신하려면 투자 성과는 더 중요해진다. 지금까지의 성적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회사 이름이 나를 대신 설명해 주지 않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배우며, 작게라도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앞으로의 30년 동안, 내가 나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