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의 인간관계 재설계

by 카푸치노

퇴직은 단지 직장을 떠나는 사건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한순간에 재편되는, 삶의 큰 변곡점이다. 매일 함께 점심을 먹고 일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이 사라지면, 나의 하루가 지나치게 조용해지면서 상실감이나 허전함이 그 자리를 메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퇴직을 인간관계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관계 지도를 다시 그리는 시작점"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지 않을까. 사라진 관계의 공백을 두려워하는 대신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인간관계를 설계할 시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술과 술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나는 평소에 스스로 모임을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사실 그럴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에 다닐 때는 이런저런 회식과 각종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겨서, 애쓰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항상 주어지곤 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는 내가 만남을 ‘설계’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90% 이상은 회사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는 가족, 소수의 친구들, 교회 지인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퇴직 후에도 그대로 살기에는 관계의 폭이 너무 좁아질 것 같았다. 이제는 직접 나서서 만남을 주도하고, 새로운 만남을 의도적으로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은 수첩을 펼쳐 들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관계별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회사 관련 지인들, 대학 동기들, 중학교 동창들, 교회 지인들, 동네 지인들, 부부 동반으로 만나는 남편 친구들, 언니·동생 등 가족들까지, 내 삶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았다.


그중 회사 관련 지인들 가운데서는 퇴직 후에도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다시 추려 보았다. 오랜 시간 회사 생활을 했지만, 막상 퇴사 후에도 만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뽑아보니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들과는 3~6명 정도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정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관계를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서로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인연들을 작은 단위로 단단하게 이어 가는 쪽을 선택한 셈이다.


남녀 대학 동기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은 그동안 일 년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보는 수준이었지만, 다들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시간이 조금씩 비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분기에 한 번 모이기로 뜻을 모았다. 중학교와 대학교의 친한 여자 친구들과도, 불규칙하던 만남을 정기적인 약속으로 바꾸기로 했다. 예전에는 “언젠가 보자”로 끝나던 말들이, 이제는 날짜와 리듬을 갖기 시작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주일 예배와 주중 셀 모임 참석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참여의 폭과 시간을 조금 더 넓혀볼 생각이다. 대학 시절 다니던 교회 지인들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겨 있었지만, 한두 명씩 다시 연락을 시도해 만나 볼 계획도 세웠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에 가늘게나마 다시 빛을 통하게 해 보는 일, 그 자체로 내 삶의 결을 달리 만들어 줄 것 같다.


새로운 만남을 향한 욕심도 생겼다. 그래서 두 달 전부터 셔플댄스를 시작했다. 주로 내 또래의 아줌마들이 함께하는 수업이었고, 태어나서 처음 시도해 보는 댄스가 주는 어색하지만 설레는 감각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살아온 배경도, 인생의 궤적도 제각각인 사람들과 한 동작을 맞추며 웃고 땀을 흘리다 보면, 내 일상에 새로운 활기가 스며든다.


추가로 마음에 드는 독서 모임을 찾고 있지만, 아직은 딱 맞는 곳을 만나지 못했다. 때로는 “안 되면 내가 독서 모임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아직은 조금 망설여지는 단계다. 언젠가 용기가 더 자라면, 책을 매개로 새로운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


또 하나, 교회 고등부 교사에도 자원했다. 청소년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숙제였다. 이제는 그 핑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과연 내가 그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청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히려 내가 더 큰 에너지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긴다.


이렇게 새로 그려 나가는 인간관계 지도가 얼마나 잘 작동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이 만들어 주는 관계에 기대어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퇴직은 고독의 시작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을 중심으로 삶을 다시 디자인하는 ‘선택적 관계의 시대’가 열리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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