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여성 정책, 샤워실 적정 온도 찾기

by 카푸치노

퇴사를 앞두고 회사로부터 설문지를 받았다. “삼성이 잘하고 있는 점과 부족한 점을 적어 달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성들이 등 따숩게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점’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후배 여자 직원들에게도 말하곤 했다. "기왕 조직 생활 할 거면, 그래도 삼성에 붙어 있어라."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회사 안에서 여성 직원을 배려하려는 움직임은 분명히 눈에 띄게 늘었다. 내가 서른 중 후반쯤 되었을 무렵, 당시 부장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여사원들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좀 먹여라. 고충을 잘 살펴주고 회사 오래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줘"

덕분에 나는 여자 후배들을 데리고 한 달에 한 번씩 회사 주변의 파스타집을 격파하며 후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젊은 여직원들은 '보호받아야 할 멸종 위기종' 취급을 받았다.


육아휴직 제도 역시 회사가 제법 앞서 나갔다고 느낀다. 과거에는 출산휴가는 '고과 포기각서'나 다름없었다. 상대평가 시스템 속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낮은 평가를 받아야 했고, 3개월간 자리를 비운 여직원은 가장 손쉬운 선택지였다. 같은 부서 선배는 아이 둘을 낳으며 각각 3개월씩 휴직을 다녀온 뒤 매번 하위 고과를 받았다. 나는 출산휴가를 앞두고 상사에게 물었다.

“부장님, 제가 출산휴가 다녀오면 하위 고과 주실 건가요?”

상사는 난처해하면서도 솔직했다.
"어쩔 수 없어. 누군가는 하위 고과를 줘야 하는데 그나마 3개월 쉬다 온 사람을 줘야지. 안 쉬고 일한 사람을 주긴 그렇잖아. 회사에 적극적으로 건의해서 제도를 바꿔달라고 해봐."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임신기 단축 근무가 가능하고, 육아휴직은 최대 2년까지 쓸 수 있다. 육하휴직이라고 하위 고과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녀 연령 기준도 만 12세로 확대되었다. 자율 출퇴근제 덕분에 아이의 등하교 시간에 맞춰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 제도만 놓고 보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여성 채용과 승진 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여성 공채 확대, 여성 간부 리더십 과정 신설, 여성 임원 비율 확대 목표 설정까지. 분명, 회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회사의 적극적인 노력이 이어질수록 일부 남성 직원들 사이에서는 ‘역차별’이라는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이 현상은 마치 샤워실에서 물 온도를 맞추는 과정과 같다. 수십 년간 얼음장 같은 '남성 위주(찬물)'였기에, 온도를 높이려 레버를 뜨거운 쪽으로 급히 돌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역차별'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 당황해서 다시 찬물 쪽으로 레버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춤을 추는 단계, 남녀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은 '적정 온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제도적 차별은 사라졌을지언정, 미묘한 심리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솔직히 고백한다. 나 역시 여직원보다는 남직원을 더 선호했다. 몇 년 전 일이다. 부서의 인력을 담당하는 후배가 남자와 여자의 이력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부장님 팀으로 대졸 인력 한 명을 배정하려고 하는데요.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겠어요?"


여직원이 우리 업무와 전공 적합도도 높고 학벌도 나은 편이었지만, 나는 고민하다 남직원을 받았다. 여자이기 이전에 리더로서 업무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사석에서 많은 남자 상사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확률적으로 남직원이 일을 더 잘한다”거나 “여직원을 다루는 게 부담스럽다”라고. 심지어 리더 평가에 중요한 지표인 SCI(Samsung Culture Index) 점수에 인색한 주체가 젊은 여성들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다.


아는 여자 후배는 두 번의 육아휴직을 거쳐 거의 5년 가까이 자리를 비웠다가 결국 퇴사했다. 개인적으로는 제도를 잘 활용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조직 전체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좋은 제도가 영악한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을까 싶은 우려도 생겼다.


한편 여자인 나는 불만이 있거나 불합리한 점이 있으면 상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곤 했다. 그에 비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뒷담화는 할지언정, 상사가 듣기 싫어할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리더가 되어 다소 난감한 지시도 군말 없이 뚝딱 해내는 남직원들을 보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반면,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또박또박 쏟아내는 여자 후배를 상대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 상사들도 나 때문에 머리 꽤나 아팠을 수 있었겠구나."


이제 눈에 보이는 제도적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남은 숙제는 마음의 '미세 조정'이다. 제도가 주는 권리만큼의 책임감을 갖는 여직원과, 과거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과정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이는 남직원. 그들이 만나 서로의 다름을 편견 없이 수용할 때, 삼성의 샤워실은 비로소 아늑해질 것이다.




이전 08화삼성의 조직문화가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