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늘어가는 주름으로 성장한 아들

by 카푸치노

서른 후반에 아들을 낳았다. 한 차례 유산을 겪은 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기쁨도 잠시, 곧바로 ‘어떻게 키워야 할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밀려왔다. 머릿속은 수많은 선택지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집 근처에는 아이를 맡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퇴근 시간이 밤 8시에서 10시를 넘기기 일쑤였던 내게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결국 출산 휴가가 끝난 뒤 시어머니께 아이 양육을 부탁드리게 되었다.


금요일이면 기흥에서 서울로 퇴근한 뒤, 내가 사는 서초구에서 시댁이 있는 강서구까지 다시 차를 몰았다. 아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아들과 보내고, 일요일 오후 네다섯 시쯤이면 다시 아들을 시댁에 데려다주었다.


금요일 저녁, 자동차의 붉은 불빛으로 길게 이어진 올림픽 도로 위에서도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았다. 아들을 보러 간다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요일은 달랐다.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떼어놓고 나오는 일은 매번 전쟁이었다. 아이의 주의를 장난감으로 돌려놓은 짧은 순간, 남편과 나는 007 작전을 방불케 하며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곧 엄마 아빠가 사라진 걸 알아차렸을 아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그리고 아들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평일이면 주말에 찍어 둔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아이를 그리워하다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같은 생각이 밀려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토요일은 거의 격주로 출근했고, 출근하지 않는 주에는 아들을 데리고 어디로든 나섰다. 주중에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 놀이공원에 가고, 식물원과 꽃구경을 다녔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오전에 교회에 다녀와 이유식을 만들고, 오후에는 다시 시댁으로 향했다.


당시의 내게는 온전히 쉴 수 있는 하루가 없었다. 그런 생활이 길어지자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주중에 아이와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의 부담도 점점 커졌다.


시어머니께 대한 미안함도 커져 갔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친구분들이 얼굴을 보자마자 “요즘 손주 돌보나 보네?” 하고 묻는다고. 원래도 예민하신 분이었는데, 어린 손주와 함께 자느라 잠을 설쳐서인지 얼굴이 눈에 띄게 상하고 주름도 깊어졌다. 그 변화를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아이가 만 두 살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하고 입주 도우미를 두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은 선택이었지만, 퇴근 시간이 늦은 내게는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삶을 설계할 때는 항상 내 에너지의 여분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감당하려 하면 결국 모든 것이 버거워진다. 그때의 나는 육아도 잘하고 싶었고, 직장에서도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채 나 자신만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비용이 더 들더라도 지속 가능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미래의 나를 위한 일종의 투자이자, 경력 단절을 막고 심리적 붕괴를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 비용'으로 재정의하는 편이 나에게 더 이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도우미 고용이 하나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공동체 전체로 보아도 도움이 되는 선택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커리어와 아이의 성장은 시어머니의 깊어진 주름이라는 대가 위에 세워진 값비싼 탑이었다. 이는 한 가족의 문제를 넘어,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우리 사회 보육 시스템의 서글픈 자화상이기도 했다. 우리가 꿈꿔야 할 사회는 누군가의 눈물겨운 007 작전이나 노년의 희생 위에 세워진 탑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 그리고 조부모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숨 쉴 틈'을 보장받는 단단한 지반 위의 집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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