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 나의 불완전한 메모리 보완법
“부장님이 지난번에 이렇게 말씀하셨었는데요.”
후배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반문한다.
“내가?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당혹스러움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 후배가 찾아와 기억력이 나쁜 상사 때문에 업무가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나는 가슴이 찔려 혼이 났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일종의 노화 현상이기에 어느 정도는 감내해야겠지만, 직장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이는 단순한 노화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했고,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기억에 의존하지 말고, 기록에 의존하자"라고.
20~30대에는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대부분의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회의는 늘어나고, 처리해야 할 일은 쏟아졌고, 내 머릿속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해마다 하나의 업무용 엑셀 파일을 만들어 사용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그 파일을 열어 하루의 일정과 해야 할 일을 적고, 하나씩 체크해 나갔다. 그 안에는 회의 일정은 물론이고, 해야 할 일, 해결해야 할 궁금한 점들, 읽은 논문 리스트,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용어 및 약어들까지 모두 담겼다.
회의 시간에는 수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적는 행위 자체로 집중력이 높아지는 효과도 있었고,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핵심 내용 몇 가지를 스스로 요약해 보았다. 나중에 후배들이 공식 회의록을 공유해 주겠지만, 기억이 가장 선명한 그 순간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하는 요약 시간은 내 기억력을 보좌하는 수단이었다.
업무 밖의 일상과 관심사는 디지털의 힘을 빌려 관리해 왔다. 처음에는 에버노트를 7~8년 넘게 사용하며 신문 스크랩부터 여행 기록, 독서 감상문, 일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하지만 휴대폰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그 기록들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허망한 일을 겪었다. 무료 사용자의 한계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경험은 꽤나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그 후 더 안정적인 시스템을 찾아 구글의 'Keep'으로 정착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중요한 메모는 상단에 고정해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이제는 나의 '두 번째 뇌'나 다름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빛을 발하는 건 여행 체크리스트다. 짐을 쌀 때마다 늘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찜찜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Keep에 저장된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준비한다. 별것 아닌 메모 한 줄이 주는 이 명쾌한 유용함에 감탄하곤 한다.
디지털의 휘발성에 대비해 매년 개인 수첩을 한 권씩 마련하기도 한다. 하루가 저물 때면 그날의 일들을 아주 짤막하게라도 기록해 둔다. 누구를 만났는지, 회식 장소는 어디였는지, 어떤 운동을 했는지, 주말 나들이 다녀온 장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수첩들을 들춰볼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 사소한 문장들이 뇌 속의 잠긴 기억을 여는 '열쇠'가 되어준다. 기록이 없었더라면 기억의 저편으로 영영 사장되었을 일들이, 단 한 줄의 메모를 통해 당시의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하윤의 수필집 《메모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양면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나의 메모는 내 뇌의 별관인 셈이었다.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메모 의존증'은 꽤 타당한 선택이었다. 에모리 대학교의 울릭 나이서 교수는 1992년 재미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1986년 챌린저호 폭발 사고가 발생한 바로 다음 날, 그는 대학생들에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상세히 적게 했다. 그리고 약 3년이 지난 후, 동일한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다'며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하지만 3년 전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고, 25%의 학생은 아예 완전히 다른 내용을 말했다(예: "기숙사에서 TV로 봤다"라고 기억했으나, 기록에는 "수업 중 친구에게 들었다"라고 적혀 있음). 나이서 교수는 이 실험을 통해 "기억의 선명함과 기억의 정확성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처음 이 연구 결과를 접했을 때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강렬한 사건일수록 그것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착각'하지만, 뇌는 시간이 흐르며 그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편집한다. 인간의 뇌는 그리 믿을 만한 저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믿는 대신, 그날의 투박한 기록을 믿어야 한다.
나의 뇌가 쓰는 '소설'에 속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불완전한 나 자신을 믿는 대신, 그날의 투박하고 솔직한 기록을 믿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