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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푸치노 Dec 30. 2022

이건 좀 자랑하고 싶네요

회사 생활을 30년 가까이해오며 항상 상사들에게만 평가를 받아왔지 주변 동료나 후배들의 평가를 받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동료 평가라는 게 생겨서 후배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월간 회의 시 발표 작성이 뛰어나십니다"

"엔지니어로써 항상 솔선수범해서 업무를 처리해 주십니다. 어떤 데이터가 나와도 바로바로 결론이 나옴과 동시에 바로 다음 스텝으로 평가를 진행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해주시는 리더십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십니다"

"오랜 공정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평가 결과 해석 및 후속 개발 방향 설정에 큰 역할 해주시고 논의가 필요한 내용은 언제든 open discussion을 진행하여 빠르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내부 회의 시 동료 선후배의 의견 경청을 잘하십니다"

"항상 상대를 배려해주시는 화법을 사용하십니다. 먼저 다가와서 대화를 걸어주시고 그 과정에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끔 신경 써 주십니다"

"기술적인 논의에 있어서 상대방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의견을 존중하여 객관적인 의사 결정이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본인의 시간을 할애하여 논문 등 각종 자료를 summary 하고 이를 동료에게 공유하여 동반 성장이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배울 점도 많고 성격이 너무 좋으셔서 같이 일하기에 너무 좋은 선배입니다. 건강을 더 개선해서 더 오래 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익명으로 진행되는 평가라고 해도 대충은 누가 썼는지 짐작 가능할 수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좋게 쓰려고 노력을 했을게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실제보다 몇 배는 더한 후한 평가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숨기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은 어떤 칭찬보다도 행복했다. 


임원 진급이 안되고 그나마 갖고 있던 리더 직함도 건강상의 이유로 반납하고 나서, 앞으로 남은 회사 생활을 어떤 자세로, 어떤 목표를 갖고 해야 되는 것인지 방향 잡기가 어려웠다. 뒷방 늙은이처럼 대충 시간 때우면서 후배들에게 월급 루팡이라는 소리 들으면서 살긴 싫었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밤늦게까지 일할 동기도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정년까지 남은 회사 생활을 보내야 할지 난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년까지 남은 기간 동안 회사일은 대충 하면서 정년 후를 준비하는 게 좋지 않냐고 얘기했다. 하지만 월급을 받는 입장에서 대놓고 회사일을 무시하는 건 양심에 꺼려졌다. 그리고, 그렇게 회사를 다니면서 후배들에게 투명 인간 취급 당하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동안은 50이 넘었는데도 임원 진급이 안되면 대부분 회사를 그만두는 분위기였다. 인사팀에서 퇴직을 종용한다는 얘기들이 들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좀 변하면서 50을 넘겨도 회사를 계속 다니는 선배들이 늘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올해 처음으로 정년 퇴직자가 생긴 정도다. 뭔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선배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자로 대상을 한정해보니 내가 속해 있는 조직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여성 비율은 5% 미만이었지만, 최근에는 여성 비율이 30%가 넘는 것 같다. 많은 후배들이 앞으로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많은 후배들이 내가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하는지 지켜볼 터였다.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붙잡은 목표는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 되기"였다. 


일을 오래 하는 대신 회사에 있는 동안은 딴짓을 하지 않고 최대한 집중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물론 목표한 대로만 실천되지는 않았다. 다만 목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전에는 내가 리더로서 일을 시키는 입장이었지만, 나보다 어린 리더에게 일을 지시받는 것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신, 시키기 전에 먼저 일을 해보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지시받게 되는 경우에도, 숨 고르기를 하며 리더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선배에게 일 시키는 게 힘들다는 느낌을 주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회사에 있는 동안은 앞선 기술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해보다 많은 논문을 읽었다. 논문을 읽어도 다음날이면 쉽게 휘발되는 기억력 탓에 논문 내용들을 파워포인트로 정리하고 가끔 후배들과 공유했다. 


그리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노력들을 후배들이 그래도 알아봐 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한동안, 정년까지 남은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길이 좀 보이는 것 같다. 달라진 상황에 맞춰 내가 변하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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