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덕연 Jan 04. 2022

자연을 달리다

트레일 러닝... 좋아 하세요?

어렸을 적부터 지루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의 나는 반복 작업을 싫어했다. ‘참을성이 없다’라고 비춰질 수 있을 정도였다. 1,000pcs 짜리 퍼즐 맞추기, 받아쓰기 100번 쓰기, 피아노 연습 100번 하기 등 같은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은 참 싫어했으며,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달리기라니. 두 발과 두 팔이 같은 자세로 수만 번 교차되는 동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라니. 처음에 달리기를 하는 나를 어머니께서 의아스럽게 생각하셨던 때가 있었다.


자세뿐만이 아니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다 보면 집 근처나 회사 근처에 주로 달리는 코스가 있고, 주로 달리는 시간대가 있으며, 주로 달리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풍경이 단조로워지고, 외부 자극이 단순해지다 보면, 달리기에 대한 흥미가 줄어들 수도 있다. 대회도 마찬가지다. 전국 각지에서 1년 동안 1,000개에 가까운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회 역사와 규모, 그리고 코스 매력도 이에 따라 참가 여부를 구분하다 보면, 신청하여 나가는 대회는 한정적이 되곤 한다. 그렇게 몇 년을 달리다 보면, 나가던 대회를 주로 신청하여 가게 되고,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로웠던 대회의 경험이 익숙해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곤 한다.


취미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흥미를 잃고 쉬고 싶은 순간이 하는데, 근지구력, 심폐지구력 등 신체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력이 크게 작용하는 스포츠 종목으로서의 달리기에서는 특히 동기부여를 꾸준히 이어가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가는 노력이 요구되곤 한다. 매일 같은 코스, 같은 동료, 같은 풍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코스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서울에도 둘레길이 생긴다고?’


트레킹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유명 트레킹 코스들이 미국의 PCT,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중남미의 파타고니아, 프랑스의 몽블랑… 이들의 공통점은 숲, 들판, 산으로 이루어진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짧게는 몇십 km에서 길게는 천 km를 넘기도 한다.

몇 날 며칠을 걸어도 만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도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한껏 느낄 수도 있고, 점 같은 작은 존재라고 겸허해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장거리 트레킹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울은 과거 선조들이 풍수지리적으로 또는 신화적으로 천혜의 장소라고 여겨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비교적 너른 땅에 큰 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으며, 높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아 북으로는 찬 바람을, 남으로는 덥고 습한 바람을 막아 주고 있는 형세이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산이 있는 풍경이 익숙하다지만, 매일 순간순간 서울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만들어 내는 멋진 풍경들에 감동받을 때가 많다. 감동이 느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서울을 둘러싼 산, 하천, 도로를 보기 좋기 이어, 157km 짜리 긴 둘레길이 조성되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시민들이 어렵지 않게 서울의 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서울 둘레길이 조성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올 무렵인 2014년 봄, 러닝을 함께 즐기던 대학 선배가 서울에 둘레길이란 게 생겼다고, 아직 다 완공되진 않았는데 일단 한번 뛰어 보겠다고 지금의 서울 둘레길 1,2 코스(수락-불암산 코스, 용마-아차산 코스)를 뛰었다. 그날 아침 토익시험을 끝나고 코스의 종점인 광나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30Km, 산속에서 거의 5~6시간을 달려온 두 명 지인들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미소를 보았다. 4월 초봄은 아직 겨울의 한기가 담겨 있어 쌀쌀할 만도 한데,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지만, 분명히 웃고 있었다. 천호역 인근의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에서 햄버거를 2개씩 입에 넣고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그들을 바라보며, 아, 나도 꼭 같이 뛰어야겠구나 마음먹었다.


그날로 바로 내 생애 첫 트레일 러닝화(일반 러닝화보다 밑창이 두툼하고, 발등과 발가락을 보호 할 수 있게 갑피가 단단함)를 구입하고, 하이드로 자켓(물통이 달려 있는 등산/트레일 러닝 전용 가방)을 구입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참 상기되어 다음 코스를 달릴 날만 기다렸다.

전날 밤 잠도 좀 설치고, 달릴 거리(고덕-일 자신 코스, 약 26km)가 거리니만큼 새벽같이 기상하여 만남의 장소인 천호역에 도착했다. 평지에서 30km 달리는 것도 까마득한데, 산에서 달린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더욱 앞섰다. 다행히 처음 평지 구간에서 남은 거리가 쉽게 줄어드는 걸 보며, 몸과 마음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코스 중간중간에 조성된 둘레길 표식을 따라 암사동의 선사 유적지도 구경하고, 그리 높지 앞은 고덕산의 오르막 내리막을 즐겁데 달리던 중, 아뿔싸. 한창 재개발 중인 공사현장이 둘레길의 중간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공사판 한가운데에서 나아갈 길이 안 보였다. 지도와 실제 길의 구성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지도와 표식만 잘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핸드폰의 GPS 앱을 열고, 현재 위치와 나아갈 길을 조마조마 비교해가며 길을 찾아 나갔다. 얼마 시간이 흘렀을까, 공사로 인해 끊어져 있던 구간(3km 정도를 돌아 돌아 찾아내었다)을 지나 우리는 다시 코스에 입성하였고, 그 이후로는 완만한 언덕을 기분 좋게 달릴 수 있는 일자산, 성내천, 탄천 코스를 무난히 달려 종점인 수서역에 도착하였다.

하루 종일 자연 속에서 파묻혀 있다가 도심을 만나니 기분이 새로웠다. 와, 내가 산에서 7시간을 넘게 달렸다니, 뿌듯함과 함께 목으로 꿀꺽꿀꺽 넘어가는 탄산음료의 청량감이 참 달고 상쾌했다.


‘콜라가 이렇게 맛있었다니’


이날의 콜라 맛은 내 평생에 먹은 어떤 음료보다도 달콤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부터 우리는 꾸준히 서울 둘레길을 코스별로 정복해 나갔다. 긴 안양천변을 뛸 때의 지루함과 헤드랜턴을 향해 달려드는 가요 벌레의 습격, 늦은 밤 산길을 헤매다 마주친 사람이 귀신인 줄 알았던 오싹함, 한여름 코스 중간에 만난 동네 슈퍼에서 사 먹는 콜라의 달콤함, 나뭇잎과 스쳐 나오는 윙윙 거리는 새벽의 바람 소리에 무서워서 중도 포기.. 등 우리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내며 서울 둘레길을 완주해 냈다. 지금은 서울 둘레길 중간중간에 스탬프도 있어 완주하면 둘레길 완주증을 받을 수 있는데, 만약 있었다면 우리가 최초의 완주가 아닐까 싶다.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갔었으니까..

 ‘러닝과 트레일 러닝의 차이점’

일반적으로 트레일 러닝은 산에서 달리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포장되지 않은 모든 길’을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라톤 같은 포장된 도로에서 달리는 로드 러닝과 구분되는데 운동 메커니즘 적으로나, 필요한 장비가 매우 상이하여 달리 접근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는 산악마라톤(mountain marathon)이랑 용어를 혼용하곤 했지만, 깊게 들어가면 트레일 러닝하고 운동의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구분해서 사용된다.

트레일 러닝은 자연 속에서 달리기 때문에, 수분 섭취, 영양 공급, 구급 처치, 보온 유지 등 생존에 필요한 장비들을 가지고 달리는 것이 필수이다. 50km 이상 장거리를 달리는 경우에는 비교적 큰 백팩에 필수 장비를 담고 뛰곤 한다. 해가 지거나, 길을 잃거나, 온도가 낮아지거나, 배가 고프거나 하는 여러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금방 다녀올 거니까 짐을 최소한으로 가져가야지’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대 다수의 트레일 러닝 대회에서는 필수 장비가 없을 경우 실격 처리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트레일 러닝을 시작하는 경우보다는, 러닝을 취미로 즐겨 하다가 트레이 러닝까지 범위를 확장하여 달리는 러너들이 대다수이다. 심폐지구력을 비롯하여 여러 신체 능력을 러닝을 통해 향상시켜야 트레일 러닝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4~5시간을 산속에서 달릴 수 있는 능력은 한 번에 얻을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도 트레일 러닝 시장이 급격히 커졌는데, 일반 로드 러닝에서 오는 지루함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같은 코스를 달리더라도 날씨와 계절에 따라 항상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즐길 수 있다. 내리막을 달릴 때에는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내 두 다리로 달리며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으며, 끝이 안 보이는 계단으로 이어진 오르막을 이 꽉 깨물고 지나 도착점에 도착했을 때의 그 희열감과 뿌듯함 또한 트레일 러닝의 큰 매력이다.


‘새로운 산을 정복하고 싶다’


서울 둘레길 이후 다음 목표는 지리산 종주였다. 지리산 능선의 양 끝의 화엄사와 대원사로 이어진 50km 정도의 능선 코스를 ‘화대 종주’라고 하는데, 빠르면 무박 2일, 일반적으로는 2박 3일 코스로 완주가 가능한 코스이다. 지리산 하면 일단 대한민국에서 산세가 가장 깊고 험하다는 상징성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막간의 시간에 본인의 대학시절의 추억을 얘기해 주셨던 화대 종주는 내 젊은 시절의 일종의 ‘버킷리스트’였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 동틀 무렵에 펼쳐진 운해, 천왕봉에서의 풍경… 그 속에서 달리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 짜릿했다.

새벽 2시 30분에 화엄사에 출발하여 끊임없이 달려 당일 오후 4시쯤 대원사 인근 골인 지점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젠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 어느 산도 마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사실 그 자신감은 체력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멘탈적인 부분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숲속의 찬 공기 속에서 달리다 보면 소화 기능도 마비되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탈수와 물중독이 동시에 와서 물만 먹고도 구토가 나고, 발에는 피멍이 든 발톱과 물집이 가득하며, 극심한 근육통으로 인해 한발 더 뻗기조차 고통스러운 순간이 반복된다. 육체의 고통을 스스로 달래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했던 경험들은 2~30대 젊은 시절에 쉽게 올 수 있는 좌절감이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산에서 달리는 선택의 동기는 즐거움이었으나, 그 끝은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달리기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