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추정’, 한국은 ‘적당한 조치'
한국과 미국의 기업회생법을 비교해 보면, 법에서 사용되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 나라의 경제적·법적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법은 단순한 조문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회가 기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운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기업이 위기를 겪고 회생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수많은 채권과 채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권도 적지 않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법적 절차를 통해 기업을 회생시키는 것은 단순한 채무 조정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기업 가치를 유지하고 향상하기 위한 투자 의사결정의 성격을 지닌다.
회생 절차에 들어선 기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점점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협의가 지연될수록, 기업의 가치가 더욱 빠르게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속하면서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과 한국의 기업회생법이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보인다. 미국은 미확정 채권이 회생 절차를 지연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법원이 이를 추정하여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즉, 미확정된 수치라 할지라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추정하여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추정은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지만,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루지 않고, 신속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법적 틀을 마련해 두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반면, 한국의 기업회생법은 같은 상황에서 "적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표현은 법원이 미확정 채권을 추정할 수도 있지만,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회생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기업 가치나 미래 현금흐름을 추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당한 조치"라는 표현은 법원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표현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무에서 회생 절차를 진행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미국의 경우 법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정을 허용하며, 이를 통해 신속한 결정을 유도하는 반면, 한국은 법원의 재량에 따라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 있어 다소 보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방식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업 회생은 단순한 법적 절차로서의 채무 조정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투자 의사결정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회생할 경우 법원은 청산가치와 계속기업가치를 비교한 뒤, 후자가 더 크다면 회생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기업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확정 채권이 많아 협상이 지연될 경우, 기업의 가치가 더욱 빠르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합리적으로 추정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전체 이해관계자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접근 방식이 보다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한국의 "적당한 조치"는 법원의 판단을 더욱 강조하는 만큼, 절차가 지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기업회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면, 불확실한 부분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추정을 활용하여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추정을 통한 빠른 결정을 보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비교적 신중한 접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중함이 때로는 기업 회생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업회생 절차가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향후 한국의 기업회생 절차가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미확정 채권과 같은 불확실한 요소들을 법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추정을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실무적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법원의 판단 기준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경제학적 원리와 기업 운영 실태를 함께 고려하는 의사결정 체계를 확립한다면, 회생 절차가 불필요하게 지연되는 문제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도 개선은 단순히 법원의 판단을 빠르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업의 조속한 정상화와 경제적 가치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