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밥을 먹고 나면 꼭 커피를 마시게 된다. 그제야 밥을 다 먹은 것 같고 입안도 개운해지는 것 같아서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서도 가까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사서 먹기도 하고 가끔은 식당에서 서비스로 뽑을 수 있는 자판기 커피에도 손이 간다. 딱히 맛있다기보다는 버릇에 가깝다. 집에서는 좀 더 공을 들이는데 원두를 직접 볶아 핸드밀로 갈아 커피를 내린다.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의 재미도 있고 만족도도 높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아라비카’나 ‘로부스타’ 같은 커피콩의 종류를 따지기도 하고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등 원산지를 따져가며 커피를 즐기기는 모양이다.
원산지나 품종을 따지는 것은 커피뿐만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와인이다. 포도의 품종, 지역, 빈티지 등을 가리고 따진다. 심지어 매일 먹는 생수도 원수를 채취하는 지역에 따라 성분과 맛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꼭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얘기가 좀 길어지긴 했지만 하고 싶은 질문과 찾고 싶은 답은 단순하다. 그렇다면 커피 마시기 전에 먹은 그 밥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매일매일 먹는 주식인데 쌀의 품종과 원산지는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신동진, 영호진미, 오대, 삼광, 참드림, 추청, 고시히카리, 해들, 진상, 골든퀸, 새청무, 하이아미, 새일미. 모두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쌀의 품종의 이름이다. 물론 이보다 다 많은 품종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쌀들이 품종별로 맛과 식감과 쓰임새가 조금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것은 잘 몰랐다. 심지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도 많다. 주요 산지를 모르는 건 둘째 치고라도 말이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생소한 이름의 쌀도 있다. 북흑조, 자광도, 대춘도, 버들벼, 진나, 각씨나, 붉은 차나락 같은 이름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일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키워져 오던 한반도의 토종벼 이름이다. 이 이름이 생소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벼를 키워 일본 내에 쌀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나라 토종쌀을 없애고 일본 쌀 품종을 가져와 심었다. 그렇게 사라진 한반도의 토종벼가 1,451 가지나 된다.
우리나라는 쌀의 역사는 유구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화석은 1만 5천 년 전 것으로 충청북도 청원의 ‘소로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견된 ‘가와지’ 볍씨는 5천 년 전의 것으로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형태로 보이는 ‘소로리’ 볍씨와는 달리 본격적인 벼농사를 지었던걸 확인할 수 있는 재배종 볍씨다.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한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인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품종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인간은 처음에는 자연적인 돌연변이를 채취해 키워왔지만 과학의 발전을 통해 두 개 이상의 품종을 인위적으로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익히고 발전시켜냈다. 쌀의 품종개량이 시작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설치된 농사시험장에서 개발된 ‘수원 1호’로부터 시작해 현재의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해낸 벼 품종은 모두 300여 종에 이른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새나라’, ‘배달’, ‘농광 ’등의 품종이 개발되어 보급되었고 1970년대에는 ‘통일벼’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
사람들에게 보릿고개를 더 이상은 겪지 않게 한 쌀로 더 알려진 통일벼는 식량 자급을 목표로 개발된 것이어서 단위면적 당 수확량은 많았지만 사실 맛이 좋진 않았다. 품종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잘 맞지 않고 인식도 좋지 않은 인디카 품종이었기 때문이다.
쌀은 크게 ‘자포니카’ 계열과 ‘인디카’ 계열로 분류되는데 ‘자포니카’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의 중북부에서 먹는 쌀로 찰기가 강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인디카’는 동남아시아의 인도,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에서 주로 먹는데 찰기가 없고 부슬거리며 길쭉한 모양한 가진 쌀이다. 흔히 '안남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후 불면 날아간다'라고 하면서 좋아하지 않았다. 딱딱하고 푸석거리는 식감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벼는 자포니카 1개 품종과 인디카 2개 품종을 삼원 교배한 쌀이어서 인디카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 찰기가 강하고 쫀득한 맛의 자포니카 계열 쌀을 내내 먹어왔고, 익숙하고, 입맛이 맞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디카 성격의 찰기 없는 통일벼는 상당히 맛이 없는 쌀이었던 것.
통일벼 보급을 위한 교육 (사진: 농촌진흥청 홈페이지)
하지만 당시에는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이유로 정부는 통일벼 보급을 밀어붙였다.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보급하기 위해 통일벼만 수매해주는 정책도 썼는데 그런 탓에 통일벼는 정부에서 수매해주는 ‘정부미’, 다른 품종의 쌀은 일반 상인들이 사가서 판매한다 해서 ‘일반미’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 일반미가 더 맛있는 쌀이라는 인식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전체 벼 재배 면적의 80%에 달했던 통일벼는 70년대 말 대형 태풍 등 잦은 자연재해와 목도열병 같은 병충해로 문제가 발생하고 또 밥맛도 좋지 않아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80년대 이후에는 병충해에 강하지만 밥맛도 좋은 품종을 집중 개발하게 되는데 그 결과 ‘오대 ’, ‘동진 ’ ‘일품 ’ 같은 벼가 개발되었다.
2021년 현재에는 지역별로도 알려진 품종이 있는데 강원도하면 ‘오대’, 충청도는 ‘삼광’, 전라도는 ‘신동진’, 경상도는 ‘영호진미’ 등이 그것이다. 경기도는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인 ‘추청(아끼바레)’이나 ‘고시히카리’가 유명하지만 최근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국산 품종인 ‘참드림’, ‘해들’ 같은 품종도 많이 볼 수 있다.
쌀 브랜드 패키지. 쌀의 특징을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왜 이런 쌀의 품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게 된 것일까? 마트에 가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마트 쌀 코너를 보면 대부분 간척지쌀, 이천쌀, 해남쌀, 임금님표, 금쌀 등등 지역 브랜드로 쌀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거기에다 모두 다 기름진 땅, 물 맑은 곳에서 생산된 것이라 홍보문구가 적혀 있지 정작 필요한 맛과 관련된 품종 정보는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브랜드지만 쌀 품종은 여러 가지 일수 있다는 것. 늘 같은 브랜드를 구입해서 같은 맛인지 알고 먹어 왔지만 사실은 다른 밥을 먹어 온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배가 고파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먹는 시대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전 시대의 쌀소비 방식은 아직도 존재한다. 밥이 배는 고프지 않게 해 주지만 삶을 더 윤택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밥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볼 일이 아닐까? 쌀포대의 앞면만 보지 말고 뒷면에 표기된 품종을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