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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쌀을 불린다.

황반장의 米식 일기 ② 쌀 불리기

by 황반장



밥 짓기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다양한 밥 짓기 스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나 혼자 먹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의 식사니까 더 신경이 쓰인다. 아내와 아이가 더 맛있게 먹어주면 괜히 으쓱해지는데, 그렇다고 영혼 없는 칭찬 리액션은 사절이다. 진짜로 밥이 맛있게 된 날은 눈치 주지 않아도 맛있다는 호평이 나온다. 이러니 맛있는 밥 짓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정보를 접하고 밥 짓기에 활용하다 보면 각각의 방법에 따라 밥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별스럽게 호들갑이다 싶을 수도 있지만 밑지는 일도 아니고 결과에 따라 은근한 만족감이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대단히 큰 일을 성취해서 큰 만족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난 소소한 일을 자주 해서 쪼끄만 만족감으로 삶을 채워보자는 주의다. 매일매일 나아지는 밥 짓는 일이 그중 하나다.


밥짓기.jpg 밥 맛은 씻고 불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밥 짓기 스킬에는 단계별로 각각의 영역이 존재한다. 밥이 지어지는 순서대로 얘기해보면 일단 쌀 고르기가 먼저다. 당연히 좋은 쌀이 맛있는 밥의 기본이다. 두 번째는 쌀의 보관법. 일회용 식재료가 아니니 이것 역시 당연한 말이다. 셋째는 쌀 씻기와 불리기. 넷째는 밥솥의 선택. 그에 따른 불 조절. 마지막으로 밥을 담아내기 까지다. 말은 길게 써 놨지만 사실 별일은 아니다. 보통 전기밥솥을 많이 사용하니깐 쌀 씻어 취사 버튼 누르면 끝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중 하나는 그렇게 간편하게 넘어갈 수 없는 과정이 있다. 하던지 안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인데 바로 ‘쌀 불리기’가 그것이다.


인터넷 검색이나 요리 서적, 전문가 인터뷰, 그리고 관련 논문 같은 것을 다 찾아봐도 밥하기 전에 쌀을 불리라고 한다. 시간에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20분 정도 불리라는 얘기도 있고, 여름에는 30분, 겨울에는 1시간을 불리라는 정보도 있다. 정수기 물이나 약수 등등 좋은 물을 쓰라는 얘기가 덧붙기도 하는데 아무튼 쌀을 불리라는 것이다.


충분한 과학적이 근거도 있다. 쌀은 주로 전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을 붓고 열을 가하면 전분 구조 사이사이에 물이 스며들어 익으면서 팽창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호화’라고 하는데 보통 60℃ 이상이면 호화가 시작된다. 밥이 되는 과정이다. 이렇기 때문에 열을 가하기 전에 쌀을 불려 놓으면, 수분이 전분 입자 사이에 골고루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열이 골고루 전달되어 쌀 안쪽까지 잘 익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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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불리기 전 / 후


이렇게 불려서 쌀이 잘 익으면 밥은 더 맛있을까? 분명 차이가 있다. 불리지 않은 쌀은 특유의 쌀 냄새가 남아 있다. 아주 나쁜 냄새는 아니지만 이를 가리기 위해 자꾸 자극적 반찬이나 짭짤한 국물을 더 먹게 된다. 쌀을 잘 불려서 지은 밥은 향긋하고 잡내가 없다. 밥만 먹어도 맛이 난다. 담백한 찬에 밥을 먹어도 서로의 맛을 돋워 준다. 또 골고루 익었기 때문에 차지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살아난다. 쌀을 불린다고 밥에서 아주 특별한 밥이 되는 건 아니지만 잘 지어진 밥이다 싶다. 완성된 밥이다.

쌀 불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설명도 듣고 직접 밥을 지어 비교해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 덩달아 밥이 되는 원리를 알게 되니 밥 짓기가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가족들이 저녁에 모여 저녁밥을 해 먹는데 쌀 불리기 30분을 기다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쌀을 안 불린다고 밥 먹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러니 쌀 불리기는 기본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그러면 쌀 불리기는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일단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하나는 불리는 시간이다. 30분을 불리면 좋겠지만, 사정상 어려우니 최소한의 시간만 불려보자. 반투명의 쌀알을 불리면 하얀색 불투명 쌀이 된다. 이 정도까지는 보통 10분이 걸렸다. 밥을 해보니 나쁘지 않다. 잡내가 많이 사라졌다.


최대의 도전은 쌀을 미리 불려 놓는 것. 미리 불려 놓으면 쌀이 너무 불어서 떡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지리산에 있는 ‘맛있는 부엌’의 대표이고, 다수의 음식 서적을 집필한 고은정 선생님의 책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에서 힌트를 찾았다. 방법은 미리 쌀을 씻어서 채반에 담아 놓는 것. 물은 밑으로 나가지만 남아 있는 물기를 쌀이 흡수하기 때문이 불리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전에 쌀을 씻어서 채반에 담아 두고 다음 날 아침, 물은 다 빠져나갔지만 남은 물기가 쌀에 흡수되어 쌀알이 불투명한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한번 슬쩍 헹궈서 밥을 지었더니 물에 30분 불린 쌀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바쁜 아침에도 잘 불린 쌀로 밥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눈으로 보았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흐르며 하얗고 뽀얀 색감, 입에 넣고 씹으면 찰기가 있으면도 부드러운 식감, 잔향이 남는 구수하고 은은한 단맛. 이게 누구나 생각하는 맛있는 밥이다. 이런 밥을 지으려면 쌀을 불리는 과정이 필수다. 불리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일까 싶은데 사실 이건 밥을 짓는 스킬의 문제보다는, 살림을 꾸려나가는 태도 문제에 더 가깝다. 오늘도 쌀을 불리면서 생각했다. 매일매일을 차근차근 지켜나가야지. 밥 짓기 전에 쌀이 불리고 내일을 위해 채반에 쌀을 씻어두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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