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대표적인 코스는 4가지가 있다.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고, 백록담을 볼 수는 없지만 눈꽃으로 유명한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도 있다.
성판악, 영실, 어리목은 가 봤지만 관음사 코스를 가 보지 못한 나로서는 제주도에 갈 때마다 밀린 숙제처럼 마음 한 편에 관음사 코스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 시간을 따로 분배하여 드디어 관음사 코스를 가을에 가게 되었다. 원래는 관음사로 올라가서 성판악으로 내려오려고 했는데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
전날 술을 마시다가 새벽 1시에 잠이 든 나는 5시 반에 겨우 눈을 떴다. 그때 가지 않고 계속 자면 관음사는 영영 못 갈 것 같아서 나는 피로를 무릅쓰고 일어났다. 밖은 이미 밝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본 한라산은 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설마 설마 했던 것 같다. 그 전날까지 해가 쨍쨍하고 더웠기 때문에 날씨 걱정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라산에 다다르자 서서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더우면 어쩌지라는 걱정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는 미리 예약을 해서 QR코드와 신분증을 들고 가야 된다. 입구에서 직원이 일일이 대조하기 때문에 빠뜨리면 안 된다.
관음사 코스는 왕복 18km나 되는 엄청난 코스다. 성판악 코스(19.2km)를 갔다 왔기 때문에 쉽게 생각을 했고, 가파르다고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오를 때 별로 안 힘들었기 때문에 만만히 봤던 것이 큰 오산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올랐나 싶을 정도로 내려올 때 끝이 보이지 않았고, 후들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내려와서는 2일 뒤 종아리에 통증이 와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관음사 코스의 처음은 완만한 산길로 시작된다. 여유롭게 걷다 보면 조금씩 오르막길이 나오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다. 중간에 아주 가파른 계단이 나오지만 짧기 때문에 오를만하다.
중간 정도 가서는 가파른 계단과 돌길이 계속 나오는데 천천히 가면 생각보다 갈 만하다. 해발 975m에 있는 탐라계곡 화장실이 첫 번째 화장실이고, 그 뒤로 계속 힘든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어찌어찌 힘들게 가다 보면 삼각봉 대피소가 있고, 두 번째 화장실이 있다. (그 뒤로는 화장실이 없으니 주의)
생각지 못하게 해발 고도가 높아지고 날씨가 흐리다 보니 추위와 싸워야 했다. 대피소 안에서 사 온 김밥과 음식을 좀 먹고 나니 다리 통증도 좀 가시고 몸도 따뜻해져서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용진각 현수교(흔들 다리)가 있는 곳까지는 비교적 완만했던 것 같다.
그리고 표지판에는 짧게 그려진 마지막 붉은색 구간이 생각보다 길었고, 체력이 소진되어서 오르는데 힘이 들었다. 그나마 마라톤 연습을 해서 체력이 있었는데도 힘들었다. 그 구간을 지나니 정상 언저리가 나왔는데 체감으로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구름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사 온 음식을 먹으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 바위 앞에서는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가끔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보이면 ‘와’하면서 백록담을 구경하려 몰려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 모습이 웃겼다)
정상은 생각보다 바람이 세고 추워서 음식도 겨우 다 먹고,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성판악으로 내려가면 돌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 것 같다는 얘기를 해서 원래 예정에 없던 하산 코스를 성판악에서 관음사로 바꿨다. 성판악으로 내려가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관음사 주차장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관음사로 내려가서 바로 차를 타고 시내로 가서 온천을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우리는 백록담을 보지 못한 채 다시 관음사 코스로 내려왔고, 내려오는 관음사 코스는 생각보다 너무 길고, 지루하고, 힘들었다.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엎치락뒤치락하며 봤던 사람을 계속 마주치며 내려왔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또 한 번의 휴식을 갖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발판으로 삼고, 저절로 튀어나오는 욕을 배경 음악으로 삼으며 걸어 내려왔다. 오를 때는 몰랐지만 내려올 때는 바위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바위를 디딜 때마다 전해져 오는 통증은 지긋지긋한 정도에 이르렀고, 가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다시 탐라계곡 화장실에 도착하는 데까지만 해도 여러 시간이 걸렸으며, 금방 다다를 것 같던 관음사 탐방로 입구도 영원히 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정신은 이미 나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픈 다리만 계속 반복해서 걷고 있는 상태였다.
지난번에 어리목 코스를 내려올 때도 내려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고 오래 걸렸는데 그새 그 고통을 잊고 제 발로 관음사 코스를 찾아온 나도 참 망각의 동물이구나 싶었다. 다음에도 지금 이 고통을 잊고 또 신나서 한라산 등반을 하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결국 꿈에 그리던 입구에 도착했고, 등정 인증서를 받는 곳이 있었는데 우리가 찍은 사진이 등록이 되지 않아 결국 인증서는 못 받았다. (안 받으면 어떠랴 우리가 갔다 왔다는 것은 확실한데)
우리는 바로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직행했고, 1시간 동안 탕에 들어가서 고생한 다리와 몸을 풀었다. 그리고 비행기 시간 전에 해장국을 먹고(같은 체인이었지만 예전에 먹었던 은희네보다는 맛이 없었다), 다시 육지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꼬박꼬박 졸았고, 비행기에 타서도 비행기가 언제 이륙하는지 착륙하는지도 모른 채 잠에 들었다. (쿵 하며 착륙하는 충격에 깼다)
그래도 너무 뿌듯했고, 정상 쪽에서는 좀 쌀쌀하긴 했지만 날씨도 괜찮은 편이어서 이번 가을 관음사 코스 등반은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정신이 맑아지고 육체가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며, 다음에도 등산이 당기는 날이면 한라산에 다시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적어도 1~2달은 그런 생각이 안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