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개국에서 바라본 프랑스인의 사랑
앙드레 루이 오지에르와 브리짓 마크롱
#프랑스 #인생 #애정 #사생활 #대통령자격
5세기경 로마는 현재 프랑스 지역에 사는 켈트족들을
일컬어 '갈리아' 혹은 갈리라 불렀다.
라틴어로 'Gallia'는 야만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지명을 'Gaul'(골)이라 하였다.
6세기 무렵 '프랑크스의 땅'이란 뜻으로 프란시아(Francia)가 되었다.
프란시아가 오늘날의 프랑스로 정착되었다.
프랑스는 유럽의 꽃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매력을
듬뿍 담고 있는 나라다.
세상에서 발음하기 가장 어려운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이다.
상상하건대 프랑스어는 본래 켈트어를 사용했던 부족이 제르마니아의 언어를 쓰던 부족들과 섞여 살았던 것 같다.
켈트어와 게르마니아 어가 서로 영향을 끼친 결과
언어의 변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로마가 지중해 주변국들을 지배하게 되면서 라틴어가 국제어의 지위를 가졌다.
골지역에는 켈트족의 언어와 게르마니아 언어가 섞인 상황에서 라틴어의 합세가 이루어졌다.
어쩌면 오늘날 프랑스어는 켈트어,게르마니아어,라틴어의
요소들이 섞여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어는 세상의 언어 중에 발음하기 가장
어려운 언어다.
프랑스어는 발음상 섬세하고 어려운 혀놀림 기술을 요구한다.
각종 발음을 하기 위하여는 혀의 능숙한 놀림이 있어야 한다.
혀를 비틀면서 내는 소리가 많다.
어려서부터 익숙 해 지지 않은 경우에는 올바른 교정이 불가능에 가깝다.
한때는 프랑스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입을 넓게 하고
혀를 열심히 굴리는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프랑스 말은 프랑스의 문화처럼 복잡하다.
프랑스 말은 프랑스식 사랑처럼 섬세하다.
프랑스 말은 프랑스식 취미처럼 음악적이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극진하게 대하여 초대하였다.
프란시스 1세는 현인이었고 예술적 안목이 깊었다.
당시 왕실은 '암브와즈'라는 곳에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왕실 전용의 '여름 별장'을 제공하였다.
프란시스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끔찍하게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다빈치의 거처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짓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마감했다.
프란시스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죽음을 곁에서 끝까지
지켜주었다.
프란시스 1세 덕분에 프랑스는 엄청난 예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프랑스를 이끌었다.
이탈리아를 정복했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제타석을 파리로 운반하였다.
이집트의 신비로운 고고학, 건축 등에 흠뻑 빠졌던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수준을 높여놓았다.
파리에는 이집트 건축 기술을 적용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예술품들이 수집되었다.
프랑스의 예술사랑은 세계 으뜸이 되었다.
프랑스인의 생활을 들여다보았다.
프랑스인과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 경부고속철 건설 당시 프랑스에서 파견된 프랑스인과
인연이 되었다.
이봉 브리엔느였다.
20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금세 친해졌다.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프랑스 신사였다.
항상 시가나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를 통해서 프랑스어 입문을 하였다.
프랑스 문화와 살아가는 모습을 체험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강남의 논현동에 살았다.
그는 한층 높은 곳에 살았다.
1년에 두 번 정도 파리에서 직장 생활하는 연인이 방문했다.
그녀 이름은 프랑스와즈이다.
프랑스의 거의 많은 사람들은 첫 결혼은 이혼으로 끝냈다.
아니면 결혼식 없이 동거생활로 들어간다.
이봉 브리엔느 역시 첫 부인과는 이혼을 한 남자다.
새 연인 프랑스와즈와 부부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을 통하여 프랑스인의 사랑하는 방식을 많이 배웠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실내에서 프랑스 연인들의 애정표현은 아주 적나라했다.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음식을 먹을 때 전식, 본식, 후식으로
나누어 먹는다.
전식을 '앙뜨레'라 한다.
프랑스인들 사랑 역시 '앙뜨레'를 잘 챙겼다.
'En entree'앙 앙뜨레(전식)
'En plat principal'앙 플라 프렝시팔(본식)
'En dessert'앙 데세르(후식)
이봉과 프랑스와즈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변함없는 우정의 정을 나누고 있다.
프랑스에서 세 번 정도 그들의 집에서 머무른 적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방문을 해도 뜨겁게 맞이해 주곤 했다.
이봉 씨는 직장에서 은퇴를 했다.
건강을 위해 프랑스의 보르도 근처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앙뜨레를 빠트리지 않듯이 사랑에도 앙뜨레가 필 소적이다.
밀회와 밀어를 섞으면서 분위기를 요리해 나간다.
친구가 함께 있는 경우에도 숨김이 없다.
제삼자가 오히려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여야 한다.
짓궂게도 일부러 과장하는 앙뜨레의 경우도 있다.
프랑스인의 사랑은 일종의 의식이다.
언어와 동작에 사랑의 케미를 섞어내는 의식이다.
단순히 욕정만을 풀기 위한 섹스게임이 아니다.
후각적인 것 시각적인 것을 중요시한다.
순서와 의식들이 몸에 배어있다.
드링크나 와인을 마시는 경우 순서가 있다.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눈으로 본다.
두 번째는 후각을 동원하여 냄새를 확인한다.
그런 후에 입술을 거쳐 입으로 들어간다.
애정표현을 미루거나 아끼지 않는다.
결혼과 동거에 장벽을 두지 않는 문화이다.
사랑이 식은 동거나 결혼은 주저 없이 정리한다.
서로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은행원이었던 앙드레 루이 오지에르는 충실한 남편이었다.
부인이었던 브리지트는 아미앵이 고향이다.
브리짓트의 부모는 아미앵에서 '장 트로뇌'라는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브리짓트의 부모는 결혼식 없이 동거인으로 살았다.
앙드레는 23살에 21살의 브리지트와 결혼을 해서 세 자매를
두었다.
남편 앙드레는 직장생활에 충실하였다
부인인 브리짓트는 아미앵의 '라 프로비덩스'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브리짓트가 39살 되는 해에 15살의 마크롱 학생을 만났다.
1주일에 한차례 정도 있는 연극수업시간이 있었다.
성격이 명랑하고 적극적인 마크롱은 브리짓트
선생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마크롱은 브리짓트에게는 자식뻘 되는 나이에 불과했다.
처음에 브리짓트는 그런 마크롱의 감정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크롱의 관심과 애정표현에 신뢰감이 들었을 것이다.
브리짓트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었으나 삶에 활력이 식어갔다.
남편 앙드레는 직장에서 거리가 멀었다.
가정과 부부생활에 전념하지 못했다.
브리짓트는 마크롱의 전폭적인 애정표현에 새로운 인생의 활력을 발견하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마크롱의 말에 브리짓트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마크롱의 말을 믿기로 했다.
브리짓트에게는 새로운 삶이 주는 기쁨이었다.
브리짓트는 남편 앙드레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려주었다.
마크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좀 더 시간을 지켜봐야 했다.
마크롱 부모의 염려 섞인 반대도 있었다.
마크롱은 학업을 위해 파리로 진학을 하였다.
브리짓트는 13년 정도를 파리와 아미앵을 오가면서
마크롱과 사랑을 이어나갔다.
주위로부터 비난과 힐책의 시선을 보냈다.
남편 앙드레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저항하였다.
브리짓트한테 심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포기할 줄 아는 신사의 도를 지켜야 했다.
결혼 32주년 되는 해였다.
앙드레와 브리짓트는 이혼의 절차를 마쳤다.
앙드레는 삶의 의욕과 동기를 상실하는 날이기도 했다.
앙드레와 브리짓트는 남남이 되었다.
마크롱과 브리짓트는 결혼을 하였다.
프랑스 사회는 타인의 애정문제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대중적이다.
'한국에서라면 가능한 이야기일까?'
자문해본다.
더구나 선생과 제자 사이라는 특수한 관계였다.
참으로 민감한 사회적 주제이다.
자식들과 가정을 가지고 있던 가정집 부인이었다.
부인이 남편과의 사이에서 24살 연상이다.
부인에게는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마크롱은 대통령 출마를 했다.
마크롱과 브리짓트는 세상의 편견을 무시했다.
전남편과 사이에 3자매들이 있다.
3자매들은 엄마의 이혼과 새로운 혼인을 격려해주고
축하해 주었다.
마크롱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마크롱과 브리짓트는 프랑스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런 불륜(?) 이력의 소유자가 대통령 출마를
했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프랑스에서는 사적인 남녀 간의 애정문제로 정치인을
평가하지 않는다.
브리짓트의 아들과 딸들은(로랑스, 세바스티앙,티팬느)
고등교육을 받고 자랐다.
각자 공학자, 의사, 변호사 신분으로 사회인이 되었다.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엄마의 새 남편을 동등하게
대접하였다.
브리짓트의 전남편 앙드레 루이 오지에르는 은둔생활을 했다.
부인이었던 브리짓트와 헤어진 후부터
세상을 등진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68살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