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변하는 중입니다
한 농부가 시인이 될 것이라는 영감을 받는다. 영감은 언제나 그림자의 작용이다. 그때 농부는 농부로서의 페르소나가 강하기 때문에 이 영감을 실행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생각도 않는다. 그러나 그림자는 끈질긴 압력으로 그를 못살게 군다. 어느 날, 마침내 그는 굴복하여 농사일은 관두고 시를 쓰기 시작한다. 개인은 자아와 그림자가 훌륭히 조화를 이룰 때 생기와 활력이 충만함을 느낀다. - 칼 구스타프 융(스타북스)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나는 동네 도서관에 갔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 모임을 알게 됐다. 고등학교 연합 동아리로, 도서관 주변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도서관 독서 동아리는 각 학교 내의 독서 모임과도 활발하게 교류를 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주말의 특정 시간대에 모여 토론을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두 번 참여해 보니, 계속 가고 싶어졌다. 매 주말마다 가야하므로 엄마에게 계속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도서관에서 하는 독서 모임에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내가 왜 그곳에 가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고, 단번에 이렇게 얘기했다.
“안돼. 너 이제 고등학생이야. 수능 준비해야지. 무슨 독서토론회는 독서토론회야.”
엄마의 말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의 말을 따라야 할 것만 같았다. 엄마 말을 안 듣고 모임에 가서 공부할 시간을 뺏기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엄마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뭐랬어? 독서 모임 가지 말랬지? 그 시간에 책을 한 자라도 더 봤으면 과연 점수가 이렇게 됐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내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 엄마 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 편에서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엄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정말 미치도록 싫었다.
내가 원하는대로 살기 위해 나는 대학에 꼭 가야만 했다. 엄마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 엄마의 영향을 최대한 받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 공부나 하자.’
그렇게 마음 먹었지만, 나는 그 모임에 못 가게 막은 엄마가 원망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 모임에 가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사람들이 많아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독서 토론회라는 공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의견과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고 표현했다. 나의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내가 생각한 바’를 얘기하다니. 정말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자체가 내게는 꿈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의 ‘책 읽기’에 대한 꿈은 깨져 버리고 만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내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었다.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학작품과 시험지에 나오는 지문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정답인지 아닌지, 그것을 가려내는 것이 내 인생에 단 한 번이어야 할 수학능력 시험에 가장 필요한 스킬이었다. 그것을 읽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답을 맞히는 것만이 중요했다.
대학에 가서도 책 읽을 기회는 있었다. 학생회와 학회 모임을 하면서 가끔 스터디를 할 때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때도 역시 내 생각을 말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책과 나의 인생을 연결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17살에 책을 읽고 내 의견을 얘기하고 싶었던 꿈은 스물아홉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내 인생의 첫 스승님인 구본형 선생님(익숙한 것과의 결별,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등을 쓴 저자이자 변화경영사상가)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스승님과 함께 공부하는 1년간 매주 책 1권을 읽고, 책에서 영감을 받은 내용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은 나의 인생과 관련된 글이었다. 이때 읽은 책들은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법의 거울과 같았다.
“거울아, 거울아.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책을 읽으며 ‘완벽’이라는 녀석에 집착해 스스로가 이루어 낸 어떤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사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봐 달라고 외치던 우울한 마음을 읽었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혐오하고 싫어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짧은 사회생활동안 한 여러 경험 중 내게 기쁨을 주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볼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있던 여러 가지 욕망도 보였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내 인생을 조망했고, 마음의 거울 속에 비친 다양한 모습을 글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글을 통해 스승님, 동기들 그리고 변화경영연구소 내의 사람들과 소통했다. 고등학교 때 그토록 하고 싶었던 ‘내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를 1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글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렇게 매주 한 편의 글을 쓸 때 사부님은 시의 적절하게 내게 주옥같은 피드백들을 주셨다. 어느 날은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길게 써라. 길------------------------------------------------------------------------------------------------------------------------------게”
이때부터 나는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어 놓은 뒤에 눈앞에 펼쳐진 일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펼쳐지는 모습들을 마치 백색 도화지 위에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림을 그려가듯 화면에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한 줄이면 끝날 내용이 10줄이 되고, 1장으로 끝날 내용이, 3장으로 길어졌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며 ‘이건 말이 되는 문장인가?, 이 내용을 얘기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까지 써도 되는 거야?’ 등의 자기 검열이란 필터를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길게, 길게 써 내려갔다.
사부님의 말씀처럼 ‘길~~ 게’ 쓰기 위해서 책이 비추어 주는 내 마음속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고, 또 꺼내고, 또 꺼내 밖으로 가지고 왔다.
자기 인식은 자기실현에 이르는 길이다 - 칼 구스타프 융(스타북스)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 나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책에서 받은 영감을 글로써 표현할 때 비로소 자기 인식이라는 큰 강에 이르렀다. 물론 글을 쓰면서 나의 무의식에 도달하는 데에도 분명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깊은 내면과 숨은 무의식을 마주하는 것은 절대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향해 응시하고 있는 무의식을 애써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적도 많다. 하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면, 한 번 마주한 무의식을 또 마주하고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죽도록 마주하기 싫었던 그것을 결국 직시하게 된다. 직시하고 또 직시하다 보면 어느새 그 무의식이 가진 상처와 감정들이 가진 예민함은 점차 흐려지고, 때로는 딱지가 앉았다 떨어지면서 치유가 된다.
아팠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슬펐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고,
생각만 해도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으나,
다시 떠올려도 아무 느낌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