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원 새끼들 내가 다 고소할 거야!!!!!!!!!!
요양병원에서 아빠와 인사를 하고 귀가하는 길. 유난하게도 쓸쓸한 기분이다.
아빠의 못된 말이 그리워질 줄은 미처 몰랐다. 차라리 사위한테 시발놈 개발놈 할 때가 나았던 것 같다. 처량하고 또 처량하기 짝이 없는.. 마치 비에 맞은 짐승처럼 바싹 말라 나만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댄다.
"돋보기 하나만 가져다다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병원에서 아빠가 필요한건 돋보기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 우린 그날로 안경점으로 달려가 돋보기를 샀다. 그사이 아빠는 한차례의 고비를 넘겼다. 혈변이 멈추었고, 수혈을 받았고, 고농도 영양제를 맞추니 컨디션이 회복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상태가 회복됨에 따라 -상시 면회 가능-방침이 번복되어 다시 전면 면회 불가 상태가 되었기에 돋보기는 결국 간병사를 통해 전해드려야 했고 조금의 실망감은 남았으나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다. 그래. 오늘만큼은 하늘에 쌍뻐큐대신 무한 감사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 단계가 격하됨에 따라 비대면면회를 순차적으로 시행하겠으니 희망 날짜를 특정하여 연락 달라는 것이다. 기쁘다. 그리고 기대된다. 낯설만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면면하던 슬픔과 불안과는 작별인사를 한지 오래다. 아빠가 요양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 역시 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적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슬픔의 바닷속을 허우적대지 않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으니 나름 큰 성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오래 머금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바로 분노이다.
슬픔이 머물던 자리에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불쌍하고 애잔한 나의 아빠. 그리고 나와 아빠의 만남을 가로막는 저 거지 같은 반동분자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불법시위와 방역지침을 어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평소에 두 배 세 배는 격앙된 목소리로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해댔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아빠를 못 만나는 거야. 코로나나 걸려버려라. 니들도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셨다면 그따위로 싸돌아다니지 못할 텐데 말이야.'
이 분노는 불특정 다수 말고도,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향했다.
"이 시국에" sns를 채우는 수많은 여행 사진과 유흥 사진. 나는 언제 불려 갈지 몰라서 옴짝달싹할 수도 없건만 신나게 밤새 술 마시고 노는 너희들 때문에 이 뭐 같은 코로나가 퍼지는 거야.라고 분노했다.
이런 상황에 놓이기 전 나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이 모두 적절하게 구성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알맞은 기능을 하고 감정의 밸런스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물론 아빠 덕분에 노와 애가 조금 과하게 분포되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마치 단일 감정으로 구성된 인간 같았다.
오로지 분노와 증오뿐.
자다 일어나서 가슴을 쾅쾅 치며 욕설을 내뱉어야 숨이 쉬어졌다. 뾰족해질 대로 뾰족해진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도 극단적으로 줄이고, 컴컴한 집 거실에서 뉴스만 하염없이 보며 하루를 채웠고 그렇게 1개월을 보낸 것이다. 많이 지쳤고 피폐해졌다. 나의 원동력은 증오가 아니다. 분노가 아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들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이 기나긴 싸움에 끝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전해져 온 면회허용소식은 그나마 꽉 막힌 숨통을 열어주는 희소식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예약을 잡고 아빠를 만나러 왔다.
한달하고도 2주 후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다림. 우리를 마중 나온 간호부장이 언덕 아래의 건물로 안내했고 조금 걷다 보니 요양병원의 별관 같은 곳에 도착하였다. 내부는 약간 엉성하지만 나름 구색을 갖춘 면회장이 보였다. 닫힌 유리문 틈사이에 투명 칸막이로 파티션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전화기와 마이크가 놓여있었다. 이게 비대면 면회 방식이구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유리문 건너편 저 멀리서 돌돌돌돌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4명의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며 면회장소로 다가왔다. 가운데 놓인 칸막이가 너무 두껍고 뿌예서 아빠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두리번대는 모습에서 당황스러움만큼은 여실히 느껴졌다. 침대의 헤드 부분을 높게 조절하여 고개를 올리고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아빠에 귀에 면회용 수화기를 대어줬으나 아빠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보곤 흥분을 해서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쟤네는 안 들어오냐??"
"어르신, 대면 면회는 불가해서 전화로만 이야기하실 수 있어요."
"그런 게 어딨어!!!!!! 전에는 안 그랬잖아!!"
"아빠, 아빠 내 말 들어봐!!"
마이크에 대고 힘껏 소리쳐 봤으나, 귀가 좋지 않은 아빠에겐 그 소리가 잘 안 들리나 부다.
"뭐라고??? 안 들려! 안 들려!~~ 뭐라고~!!!"
뭔가 개.똥.망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는 우리가 왜 파티션 건너편에 앉아 멀뚱 거리고 있는지, 자기가 있는 곳으로 냉큼 들어오지 않는지에 대해 약이 바싹 오른듯 격한 분노를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마이크와 수화기는 무용지물이다. 아빠의 고함소리가 워낙 커서 건너편까지 쩌렁쩌렁 울렸기 때문.
"이 병원 새끼들 내가 다 고소할 거야!!!!!!!!!!"
조금의 소동 끝에 아빠는 조금 진정됐고 그제야 '우리가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하면 본인이 수화기로 그 소리를 듣는다'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의 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으니, 대화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병원 놈들이 밥을 안 준다."
"네? 병원에서 밥을 안 줘요??(콧줄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밥을 주지 않겠지만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물어봄)"
(안 들음)"아주 배가 고파 죽겠어!!!!!!! 못된 새끼들. 기다려봐라 나가기만 하면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네 아버님 배가 많이 고프시겠네요.. 고생 많으세요. 그것말고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안 들음)"안 서방,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다고 했지? 그 친구 좀 데리고 와라. 내가 선임을 할 테니."
아빠는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법적 대응에 대한 부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비상함을 발휘했다. 아주 예전에 남편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 중 변호사가 된 친구가 있다는 말을 잠깐 흘려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언급한 것이다. 잠시 감탄을 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는 살면서 그렇게 크고 작은 사기를 많이 당했음에도 불구. 한 번도 누군가를 법적으로 처벌해 본 전적이 없다. 제정신과 치매의 모호한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아빠가 이토록 뚜렷하게 남편의 변호사 친구를 기억한 것은 본인의 삶을 파먹은 쥐새끼 같은 사기꾼들을 단 한 번이라도 통쾌하게 응징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의 방증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네 다 고소해 드릴게요. 제 친구 데리고 와서 여기 병원 사람들 싹 다 고소해 드릴게요"
주변 간호사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우리도 씨익 웃는다.
남편이 "해드릴게요"라고 답하자마자 아빠의 흥분도가 높아졌다.
"그래!! 당장 다음 주에 데리고 와라!!!"
"네 다음 주에 같이 올게요~"
아빠는 신이 났다. 매번 안된다-그건 힘들다. 라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던 사위와 딸이 다 해준다고 하니 기운이 난 듯한 모습이다. 옆에서 킥킥대며 서있는 간호사와 병원 직원들을 보고 "너네 싹 다 고소할 거야!!"라고 외치는데 상기된 목소리에서 의기양양함이 묻어난다.
우리 옆에 서있던 간호부장에게 "저렇게 소리 지르시는 거 보니 건강은 회복하신 거 같네요"라고 농담을 던지니 간호부장도 끄덕이며 "그러신 것 같네요"라며 웃었다. 고소고발 예고가 난무하는 현장이었지만, 아빠 빼고 모두가 평온했다. 뒤에 면회 타임이 없어 우리에겐 예정된 시간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아빠의 힘이 빠지며 빠르게 상태가 안 좋아졌기에 일찍 면회종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발음은 몇 가지의 단어 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지고 있었고 이상한 표정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이처럼 엉엉 우는 표정을 지으며 흐느끼더니 우리 보고 오라는 듯 손짓하곤 갑자기 팔로 하트를 그리며 사랑을 표출. 그러다 "변호사!! 잊지 마라 변호사!!"를 외쳤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마지막까지도. 그런 아빠의 모습에 간호사들이 빵 터져서 (솔직히 좀 귀여웠음) 슬프지 않게 뒤돌아설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면회시간이 생각보다 훈훈해서 다음번엔 아빠가 너무나 아끼고 이뻐했던 고양이를 데려올 수 있느냐고 물어봤고 간호부장은 잠깐 생각하다가 오늘처럼 가장 마지막 타임으로 잡으신다면 가능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빠와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차에 타서 내뱉은 나의 첫마디는 "배고프다"였다.
속을 아주 꽉 채우고 있던, -아빠와 만나게 못하게 방해하는 불가항의 존재-에 대한 분노는 어느새 사라졌고 그 자리에 허기가 냉큼 들어와 앉은 것 같다.
"아주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
분노보단 허기짐이 낫다. 그건 조금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