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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와 친구이야기

by 홍만식


"많지 않아도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어도

나에게 친구가 있음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

멀리 있어도 가만히 이름 불러볼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박인수 가수가 부른 '친구이야기' 가사다.

며칠 전, 미국 L.A에 살고 있는 대학 동창이 박인수 전 서울대 교수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는 소식과 함께 '친구이야기' 노래를 보내왔다.

그는 요즘 미국에서 느끼는 감정이 이 노래에 그대로 담겨 있고, 본인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또한 박 교수가 이동원 가수와 함께 불렀던 '향수'가 생각났고, 이 노래를 듀엣으로 즐겨 부른 친구들이 생각나 울컥했다고 했다.

대중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를 불렀던 테너 가수, 박인수는 클래식 대중화를 이끈 국민 가수로, '향수'는 클래식 성악가와 대중가수의 협업인 크로스오버 명곡으로 꼽힌다.


내 친구, 최 사장은 노래를 잘했다. 특히 '향수'와 '그리운 금강산'은 그의 애창곡이었다.

2014년 여름 어느 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는 중에 최 사장이 상해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예상밖의 소식이기에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이틀 뒤, 북유럽 여행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고인이 된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으로 갔다. 최 사장 부인, 김 여사와 고인의 대학 친구, 박 형이 고인의 유골을 안고, 비통한 표정으로 출국장 밖으로 나왔다.


내 차에 친구의 주검을 싣고, 올림픽대로를 달릴 때, 인생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어둠이 깔린 적막한 한강을 바라보고,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명제로 머리가 복잡했다. 아무도 차에서 대화를 하지 않았고, 간혹 긴 한숨 쉬는 소리만 들려와 더욱 분위기가 침울했다.

어느덧, 우리는 잠실 종합운동장을 지나 서울아산병원 영안실에 도착하니, 많은 친구들과 직장 선후배들이 애도를 표하고, 유가족들이 솟구치는 슬픔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오열했다.


최 사장은 1970년대, 군에서 제대한 후 안암동에 있는 K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 H 종합상사에 입사하여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1990년대 초, 최 사장은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브라질로 수출한 거액의 물품 대금이 부도가 나, 회사를 부득이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브라질은 IMF 사태로 경제 상황이 아주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직장 선배가 소개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 취직하였고, 상해 현지법인에서 근무해 왔다.


고인이 발인하는 날, 고향 친구, 박 회장이 유골단지를 안고 내 옆자리에 앉고, 우리는 고인의 본적지 충청남도 금산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차창 밖을 멍하게 바라보니 세상은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평온하고, 많은 자동차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다. 검은색 추모 리본을 매달은 내 차만 슬픔을 세상에 알리는 듯했다.

서울을 출발한 지 약 2시간이 지나자 친구의 유택이 마련된 선산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최 사장 인생길의 마지막 종착지가 되었다.


박인수 교수의 별세 소식을 접한 그다음 날, 옛적 최 사장과 부지런히 오르내렸던 대모산을 찾아 복잡하고 어지럽게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친구와 함께 보낸 세월을 회상해 보았다.

3년 전 어느 날, 최 사장의 둘째 딸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혼자 하객을 맞이하던 김 여사 얼굴도 떠올랐다. 김 여사와 자식들의 근황이 궁금하여 용기를 내고 전화를 걸었더니, 김 여사는 반갑게 가족들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본인은 몇 년 전, 대학 교수에서 은퇴하여 지금은 한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고 첫째 딸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로펌에서 변리사로 근무한다고 했다. 둘째 딸은 상해에서 대학을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어 인터넷 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 기반을 잡았다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오랜만에 친구의 가족 소식이라 기분이 홀가분하고 친구가 지금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나라에 있는 친구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늘 그랬듯이 씩 웃는 모습이 아련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벤치 앞에 걸려있는 시판詩板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기하게 정지용의 시 '향수'가 적혀 있었다.


대모산을 내려오면서, 내가 최 사장과 듀엣으로 자주 불렀던 '향수'를 나 혼자 크게 불러 보았다.

"서리까마귀 우지짓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길옆 풀숲에 있던 화려한 빛깔의 장끼 한 마리가 내 노래를 듣고, 큰 소리로 울면서 앞산으로 날아갔다.

https://youtu.be/8cVVamMmg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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