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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무덤

- '아내의 묘비명' 시집을 읽고

by 홍만식


아내의 무덤


/ 김상기


겨울 눈밭에 내가 서 있다

손발보다 가슴이 더 시리다


새봄이 또 와도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소나기가 하늘 무너진 듯 울고 간다

내 눈물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가을 마른 잔디 위로 빈 바람이 흩어진다

내 영혼도 부서진다


허깨비 같은 내가

하릴없이 무덤가를 서성인다


오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다시 만날 날이




김상기 시인이 쓴 '아내의 무덤'이라는 시다.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시로 읊었다. 김상기 시인이 2011년 12월에 발간한 시집, '아내의 묘비명'에 실렸다.


이 시집의 서문에 유수일 주교님은 이렇게 말했다.

"소화 데레사 자매는 참으로 깊은 신앙심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데레사 자매가 오랜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공원묘지까지 동행해 장례 미사를 집전하면서 마치 한 성녀(聖女)를 떠나보내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헌신적인 아내였고 두 아들의 더없이 좋은 어머니였던 데레사 자매는 지금 천국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기도 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시인 김상기는 MBC 보도국장을 거쳐 그의 고향에서 대전MBC 사장을 역임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유신시절, 대학원을 다닐 때에 '어두운 세상'이란 시를 써, 대학 신문에 발표한 이 있다. 26살에 '젊은 기자의 초상'이란 시를 마지막으로 30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는데, 아내가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부터 펜을 다시 잡았다. 이 시집에는 아내를 향한 사랑, 그리움 그리고 아픔을 함께 담았다.

황인숙 시인은 2014년 6월 모 일간지에 이 시집을 읽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도 더 잘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시인의 '남은 삶과 꿈'이 노래가 되기를! 결혼은 보험이나 계약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부부애가 신화처럼 느껴질 테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 시인도 암으로 4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5년 여름, 그의 시처럼 사랑하는 아내와 한 줌의 흙으로 만나게 것이다.

나는 시인과 동서지간으로, 20여 년을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시인부부와 함께 보낸 추억을 회상해 본다.

시인의 아내, 데레사는 성격이 명랑하고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를 머금었다. 특히 자식교육은 지극정성이었으며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자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 암으로 5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데레사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내 고향, 즉 제부의 고향에 가보고 싶어 했다. 나는 처형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어느 , 시인 부부와 함께 동해안에 위치한 내 고향을 찾았다. 내가 어릴 적, 자랐던 동네와 성내동 성당을 둘러본 후 경치가 신비하고 아름다운 환선굴로 갔다. 데레사는 환자의 몸이기에 동굴 구경이 힘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애써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넓고 푸른 경포대 바다를 바라보면서 소풍 나온 어린이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결국, 이 외출이 데레사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데레사가 세상을 떠나자, 시인은 홀로 남게 되었으며 자식들은 공부에 쫓겨 바쁘게 생활했다. 시인은 양재천을 혼자 걷는 것이 일상이자 유일한 낙이었다. 가끔은 나와 함께 식사를 하며 복잡한 세상사를 논했다.

어느 날, 시인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분당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데려 달라는 부탁을 다. 나는 시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였고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약 보름 후, 시인 아들의 전화 연락을 받고,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시인은 이미 숨을 거두고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김상기 시인은 클래식 음악 감상과 동양란 가꾸기를 즐겼다. 또한 불우이웃 돕기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특히 유니세프와 모교인 대전고의 ‘일대일 결연 장학금’ 모금에 10년 동안 힘을 보탰다.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4일 전, 대전고동창회에 급히 전화를 , 휠체어를 타고 은행으로 가, 본인이 노후에 쓰려고 모았던 일억을 전액 모교에 기부했다. 그리고 늘 그리워하던 아내를 그의 시처럼 한 줌의 흙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시인의 산소를 찾아가, 아내의 묘비명 '연가'와 자신의 '비원(悲願)'이란 묘비명을 읽으며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나도 소리 없이 가슴으로 운다. 시인의 두 아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반듯하게 성장하여, 첫째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둘째는 의사가 되어 시인이 세상을 떠났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나는 양재천을 산책할 때, 가끔은 시인이 살았던 아파트를 멍하게 바라보고 지금 전화하면 시인을 만날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하늘나라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시인 부부가 하느님의속에서 평안하시길 재차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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