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 가족이야기 - 우리엄마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오늘 글쓰기 수업에서 시를 하나 들었는데, 그 시를 보면서 얼마 전 추석에 엄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수업이 끝나고 인터넷에서 시를 찾아서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 이 시 너무 좋지?' 하면서...
그러고서 한참 일하다 전화기를 보니 엄마에게 답이 와있다.
'모든 사람이 저렇게 느끼고 살지만 별로 다르게 살수도 없지. 저 글이 너무 좋다. 내일 올 때 우리집 반찬통 다 가져와.'
역시 감성적이고 실용적인 우리엄마.
이번 추석은 토요일이었다. 금, 토, 일 추석에 월요일 보너스. 엄마는 추석 바로 얼마전 코로나에 걸려서 추석을 이틀쯤 앞둔 수요일 밤 12시에 격리에서 막 풀렸다. 그리고 답답함에서 해방된 기념으로 밖에 나가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쓰레기버리고 집으로 와서는 자식들에게 명절에 아무도 오지말라고 문자로 엄명을 내렸다.
언니, 나, 남동생은 카톡방에서 긴급회의를 했고, 긴급한 만큼 금방 결론을 내렸다. 서운해도 이번에는 여러명 모이지 말고 삼일중 하루씩 맡아서 엄마네 다녀오기로. 나는 금요일에 엄마음식하는 걸 돕고, 남동생은 토요일에 제사를 지내고, 언니는 일요일에 와서 음식으 먹는 것이 우리가 세운 계획이었다.
장남은 제사를 지내야하니 날짜 선택권이 없고, 홀머어니가 제사 지내려고 며느리들을 기다리는 언니는 명절전날 시댁을 가야한다. 그런 고로 내가 첫날 당번으로 자원했다. 거기다 엄마 옆에 살면서 엄마의 건강, 살림, 음식 등을 항상 살뜰이 챙기는 언니는 타고난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엄마의 수다에 장단을 맞추거나 적당히 추임새를 넣을 줄 모른다. 내가 낫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의 목욕탕 친구고, 여행 친구이다. 엄마는 못이기는 척 우리의 계획을 승인했다.
금요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집에 갔다. 엄마가 언니 가족이 사는 분당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엄마와 우리가 함께 살았던 쌍문동 집이 언제나 우리집이었는데, 분당 엄마집은 우리집이라고 불러지질 않는다. 아직도 그 집과는 낯을 가리는 중이다. 엄마 집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틀리고 순서처럼 엄마가 나와서 문을 열어준다. 몇년 전 엄마가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영 손에 익지를 않는다. 집에 들어서는데, 역시나 엄마는 나의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다. 집에서 정갈하게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서 쓰고 있다.
"엄마, 왜 그러고 있어? 마스크 벗어. 내일 엄마 애인 올 때 써. 아우, 별나 진짜! 나 오기전에 엄마 여기서 마스크 벗고 있었을 꺼 아니야? 나 여기 들어왔으면 이미 물 건너 갔어. 벗어, 벗어."
"그래도 조심해야지."
남동생의 18개월 난 아들을 나는 엄마 애인이라고 부른다. 하루종일 오매불망 꼬맹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엄마의 요즘 일상이다. 엄마가 하던 계모임에는 룰이 하나 있었는데, 손자손녀 자랑은 돈내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룰은 없는데도 엄마는 그냥 말없이 행복한 얼굴로 사진만 보고 있다.
그러다 내가 조카 칭찬을 하면 신나서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친다.
"그치? 자동차 꼭 쥔 저 손 좀 봐바. 내 손자라서가 아니라 진짜 얘는 너무 귀여워."
물론 내 보기엔 엄마 손자라서 그렇다. 그래도 엄마의 행복한 얼굴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엄마, 이제 요리 시작해야하는 거 아냐?"
"천천히 하지 뭐.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밥 먹고 시작하자. 아, 감주했는데, 한 잔 줄께. 있어봐."
엄마는 사실 우리가 올 때 쯤 거의 모든 준비를 해 놓는다. 재료 준비도 다 끝나서 전을 부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엄마를 알기에 언제 다하나 하는 걱정은 없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앉아서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새로운 회사 사람들 이야기. 엄마는 수영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 엄마 수영반에는 나보다 어린 엄마의 수영 동기들도 있는데, 우리 엄마를 언니라고 부른단다. 같이 다니는 육십대 친구들, 이른바 6학년 친구들은 다 같이 코로나에 걸려서 서로 문자로 안부를 묻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코로나에 걸려서 관심받는다고 좋아했던 친구도 이틀 째부터는 답답해한다고...
새로 사람들 만나고 같이 어울리는게 신나는 표정으로 엄마는 친구들 이야기를 한다. 누가 어디 여행갔다와서 밥을 사고, 그 다음에는 누가 밥을 사고, 밥먹으면 근처 어디에서 차도 마신다는 이야기 끝에는 한 사람씩 소개 같은 일화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 시절에 서울에서 대학 나오고 평생 돈을 벌어본 적 없다는, 딱 봐도 부잣집 딸이라는 육십대 어느 친구는 우리 엄마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농사일이 바쁠 때 농사일 돕느라 학교 못 간 이야기를 하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건 너무 했다!" 하고 화를 냈단다.
"그래서 엄마는 뭐라고 했어?"
"너무 한거 같은 소리 한다! 시골에서 농사일 바쁘면 강아지 새끼도 심부름 하는 거지!"
엄마 말끝에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고 했다.
엄마는 몇 달 전부터 주민센터로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허리수술하고 무릎이 안 좋은 엄마에게는 수영만한 운동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언니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코로나로 없어졌던 강좌가 생기기도 전에 수영장에 가서 대기를 해놓고, 매일 같이 확인 전화를 한 결과다. 일주일에 세번 수영하러 가던 엄마가 자기만 너무 느리다고 인터넷으로 오리발 좀 사라고 한 게 본격적인 수영의 시작이었다. 엄마가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언니는 일주일에 다섯번 가는 과정으로 등록을 했다. 절대 물에 못 뜰 거라던 엄마는 자유영은 물론 배영까지 마스터하고, 더이상 영법에는 욕심내지 않는다면서 접영을 배우고 있다.
"내가 유튜브를 많이 봤지. 거기 강사님들은 나만 봐줄 수는 없으니까 가기 전에 찾아보고 마음으로 연습하고 가서 해보면 달라. 안되던게 좀 된다니까."
엄마는 어떻게 수영을 배우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싫증을 잘내는 편이라 늘 취미생활은 3개월 차에 그만둬왔다. 발레도, 요가도, 헬쓰도. 수영은 예외였다. 첫달에 그만두었다. 음파음파를 배우는데, 음도 내뱉은 숨이고, 파도 내뱉는 숨이다. 대체 언제 숨을 들이쉰단 말이지? 결국 나는 음파음파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