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 가족이야기 - 우리엄마
수영을 다녀오면 엄마는 오후에 거의 집에서 책을 읽는다.
"요새는 무슨 책 읽어? 그거 이상한 편의점 읽어봤어? 너무 재밌던데..."
"불편한 편의점? 아우. 그거 진작 읽었지. 너무 재밌더라. 2권까지 다 봤어. 아껴봤는데도 금방 다 봤어."
엄마는 유명한 책들은 거의 다 읽어서 요즘은 아들이 핸드폰에 깔아주고 간 밀리의 서재에서 재미있는 책을 찾아 읽는다. 그러다 눈이 아프면 집에 있는 삼국지를 펴서 읽고 또 읽는다.
나 고등학교 때 였던가 삼국지 읽으면 서울대 논술대비가 저절로 된다고 유행할 때 샀던 전집인데, 서울대를 목표로하지 않았던 나는 그책을 펼쳐보지도 않았고, 책장에서 우아하게 자리만 차지하던 삼국지는 결국 엄마의 책이 되었다.
몇 년 전 허리 수술을 하기 전까지 엄마는 늘 바빴다. 이제는 우리먹여 살릴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엄마는 관성처럼 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허리 수술을 하고, 일을 못하게 되면서 엄마는 엄마 말대로 시간부자가 되었다.
"엄마는 진짜 공부했으면 잘 했을 꺼 같아. 책 이렇게 좋아하는데, 엄마 글 좀 써봐. 이제 읽을 것도 없지 않아? 엄마가 직접 써!"
엄마 기분 좋으라고 칭찬 반, 진심반으로 글쓰기를 권했다. 어린 날 언젠가 훔쳐 본 엄마의 일기는 정말이지 나를 웃기고 울렸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말이 없다. 그러다 입을 뗀 엄마는 말했다.
"나는 참 안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게 뭔소리래?"
"내가 책을 좋아하는지 뭐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칠십까지 살았으니 얼마나 안 된 인생이냐. 다음에는 아주 부우-잣집에 태어나서 공부나 실컷 하면 좋겠다. 밥 먹자."
엄마는 서둘러 점심을 차리러 일어났다.
"그러네."
나도 같이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흥을 돋우는 추임새는 내 전문이건만, 나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화장품 팔러 다닐 때, 작은 가방 메고 수영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여유 있어 보이고 부러웠는데, 요새 수영다니잖아."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에게도 나의 엄마 같은 학구열 있는 엄마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얼굴도 기억 안나는 외할머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엄마가 안 된 인생을 살게 된 데이는 우리 삼남매의 역할이 가장 크다. 너무 일찍 먼 길 떠난 아빠와는 순위다툼이 좀 있을 것 같다.
엄마는 서둘러 점심을 차렸다. 명절음식 많이 할 텐데도 딸 먹인다고 새 반찬을 많이도 했다. 열무김치와 고구마순 볶음, 가지나물. 기분 좋은 아는 맛이었다. 엄마 밥상은 식탁에, 내밥상은 거실에 차렸다. 코로나 걱정에 마스크도 쓰고 있는 엄마가 한 상에서 밥을 함께 먹을리가 없다. 급한 것도 없는 시간부자 엄마는 바쁘게 살아온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도 허겁지겁 서둘러 식사를 마치셨다.
오늘 선생님이 소개한 시는 박노해 시인의 시였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엄마는 주어진 숙제를 마쳤다. 어려운 과제였다. 많이 배우지 못한 엄마가 별로 가진 것도 없이 혼자서 자식 셋을 공부시켜 대학에 보내고, 짝 찾아 결혼도 시키고, 이제 다섯 손자손녀를 두었다. 삼남매 모두 엄마 닮아서 밥벌이는 너끈히 하면서 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엄마는 선택과제도 해냈다. 나는 욕심내어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재수해서 대학간 남동생은 석사까지 마쳤다.
이제 엄마는 누릴때가 되었다. 엄마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주름치마 입고 엄마 손을 잡고 나가서 단풍이 좋은 곳에서 이 가을 속을 여유로이 걸으며 살랑이는 바람을 음미해야겠다. 나의 엄마가 앞으로는 바쁘게 걷다가도 예쁜 나뭇잎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바라보는 시간을 보내기를, 엄마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미와 순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를...
그래서 사랑하는 나의 목욕탕 친구가 애인을 바라볼때 짓는 그 예쁜 웃음을 오래오래 보여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