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away Wife Syndrome은 결혼 생활에서 불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이혼을 당한 남자들의 눈에는 이혼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일이다. 아내는 계속 불평하고 불평하고 불평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불평을 멈춘다. 남편은 상황이 나아졌다고 느끼고 자기 할일을 하며 일상적으로 보내다가 난데없이 이혼을 당하게 된다.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혼만은 피하려고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아내는 떠났으며 결혼을 유지할 의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아내의 전조증상이나 경고가 분명히 있었겠지만 남편이 얼마나 잘 알아차리냐의 문제일 것이다.
미국에서 이혼신청의 2/3는 여자가 접수한다고 한다. 이것은 여자들이 결혼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자신은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이 없어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혼 초반에는 여자들이 대부분 결혼을 최우선순위로 생각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속깊은 대화를 하거나 같이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상황 상 결혼생활이 1순위가 될 수 없을 때가 오면, 여자들은 남편과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만약 결혼이 우선되지 않을 경우, 여자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계속 불평하게 된다.
결혼관계에서 그의 잘못을 계속 찾아내며 지적하기 시작하며, 그 때 남편은 아내의 불평에서 자신이 실패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내가 불평할수록 남편은 아내와 보내는 시간을 피하게되고, 그 결과 아내는 조용히 떠날 계획(exit strategy)을 세우게 된다. 막내가 대학만 가면,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면, 내가 혼자서 아이를 키울 환경이 만들어지면, 등등.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으며 그 시간 동안 아내는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계획을 이루기 위한 자원을 준비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게 아내의 불평이나 잔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니 남편은 상황이 나아졌다고 믿게 된다. (false sense of security)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서로 알게모르게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내에게 이혼 요구를 받게 되면 남자들은 충격과 절망을 느끼며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관계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왜 행복하지 않았는지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따진다. 남편의 이 질문이 실날같던 아내들의 희망을 싹둑 잘라버린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혼이 타당하다는 이유를 찾아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하기 보다는 상대가 그것을 이루어주지 못한다며 상대의 죄책감을 유발시켜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그 이유는 첫째, 두려움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내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일지 아닐지, 내가 잘못되었는지, 이 결혼생활에서 상대만이 잘못이며 상대만이 고쳐야한다고 생각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둘째,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대치 때문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결혼은 이래야만 한다는 기대를 갖고 그들의 결혼을 기대치에 맞추려고 하지만 사실 상대의 의견이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아내가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불평하면 남편은 감정에 공감해주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그 문제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남편의 입장에서 남자들의 방식이기 때문. 그러나 이혼을 준비하려는 아내 Walkaway Wife 는 이미 결혼과 사랑을 잃은 것을 애도했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그 결정은 홧김에 내린 것이 아니라 몇 년동안 반복적인 실망과 절망을 경험하고 차곡차곡 준비해온 것이다.
혼자서 이혼을 준비하는 아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Weiner-Davis 박사는 그들이 모든 것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말한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여자는 언어적인 사람이고, 남자는 행동에 더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 남자들이 반응하는 시점은 아내가 이혼을 접수하고 나서이다. 아내가 드디어 무언가를 실행에 옮겼을 때, 남자들은 반응한다.
이혼 접수 시점이 결혼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아내가 떠나지 않도록 노력을 시작하는 때이다. 그리고 그 순간 역할이 바뀌었다. 남편이 아내를 쫓아다니고 아내는 구애를 받는 입장으로. 하지만 몇몇 아내들에게는 이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느껴진다. 남편의 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내도 있고 남편이 180도 바뀌어서 완벽한 남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아내도 있다.
Weiner-Davis 박사는 이혼까지 가기 전에 여자들이 남편이 반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 "모든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혼이란 건 정말 모순적인 것 같다. 양날의 칼날처럼 서로를 찌른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게 되고,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사랑해서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지를 몰라서 헤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이것만 빼면 완벽한데 어떻게 고칠수 있을까요? 결혼이 행복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요? 부부가 같이 봅니다 누구의 잘못인가요? 그가 정신차리도록 댓글 보여주려고요 이런 행동이 정상인가요? 네이트판, 애로부부, 연애의 참견 같은 포털에 하루에도 수백건씩 올라오는 고민 사연들이다. 얼마나 결정하기가 힘드니 결정장애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그러나 바꿔 말하면 우리는 행복하고 싶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싶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답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사실 어느 누구든 모두 그들 안에 상처받은 내면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단지 힘든 상황에서 행복하고 싶어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지 팔자 지가 꼰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하라고 조언해줘도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라고 해도 각자의 사연이 있고 상황이 다르기에 그렇게 쉽게 결정 내릴 수 조차 없을 때도 있다. 남편의 잘못을 한 번은 실수할 수 있다고 넘어갔지만 내 마음에는 한이 서렸을 때도, 남편을 ATM 취급하며 살기로 했더라도 내 삶이 공허하고 무기력해 질 때도 있다. 결혼을 후회하지만 이혼이나 졸혼까지는 아직은 결정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이거나, 사과는 받았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거나 이유는 설명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애매하게 기분은 나쁜데 화내자니 치사한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내 팔자 내가 꼬았으니 풀어야 하는 사람도 나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 것도 나였고, 우울증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였고, 감정적인 독립과 주체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나였다. 내 결혼이 행복하지 않다고 주저 앉아 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걸어나가야 했던 것이었다.
내가 수강했던 Laura Doyle의 결혼 생활 수업에서는 결혼을 해도 생활이 합쳐져도 일상을 함께해도 남녀관계는 남녀관계로 유지해야 결혼이 행복하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었다. 정확히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우리의 모습으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연애시절에 서로를 보고싶어 하며 가는 시간이 아쉬웠던 그 때처럼,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서로 영원히 함께 행복하자고 약속했던 그 때 처럼. 결혼했다고 해서 관계의 역학구조가 바뀌면 그 관계 자체가 변화하고, 그 변한 관계가 주는 만족감이나 행복도가 좋아질수도 나빠질수도 있으니까. 복불복이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남편이 이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저런 남편의 일들을 도와준다고 한다. 남편의 잡다한 일을 대신해줘서 시간이 남으면 나에게 써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는 남편이 일에 성공할 수 있도록 다른 사소한 것들은 신경 쓸 필요 없게 편하게 해주려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농담삼아 큰아들 키운다고 한다. 남편을 위해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옷챙겨주고 건강챙겨주고 약챙겨주고, 우리 스스로를 '엄마'의 역할로 남편을 '아들'의 역할로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남편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을 대신 해주고, 그런 것을 '내조'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남자는 엄마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가족끼리 스킨십하는 거 아니라면서 서로를 멀리하기만 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하는 말장난처럼 질식시키다 라는 영단어 smother 에는 mother 가 들어가 있있고, 가족의 복수형인 families 라는 단어에도 lie 가 들어가 있다. 나는 남편을 엄마처럼 돌봐주려고 결혼한 것도 질식시키려고 결혼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자지간은 내리사랑이다. 사랑과 관심을 쏟기만하는 엄마와 받기만 하는 아들. 사춘기 아들이 반항하는 것처럼 남편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남자의 이상형이 엄마같이 잘 챙겨주는 여자라면 뭐 천생연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지, 멀쩡히 살아계시는 시어머님도 계시는데 내가 남편의 엄마역할을 도맡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관계가 모자관계이지 부부관계는 아니게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남편이 연애 때 처럼 나를 쫓아다니고 나에게 구애하고 나를 웃게 해주고 싶어하고 나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애때 그랬던 우리의 관계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바뀌 버린 것이다. 단지 결혼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결혼하고 나는 아내가 그는 남편이 되었어도 우리는 남녀관계로 남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대신해줄 때마다 남편을 무능력하게 만들고 남편의 선택권을 박탈하고 남편의 남자다움을 어린이처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정말 모순적이다 사랑해서 해주는 건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다니. 남편이 원하는 사랑의 방식이 그렇게 다르다니.
남편을 위해서 남편의 자잘하고 사소한 일들을 챙기면서 주위에 머물르고 남편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보낼 수 있도록 24시간 대기조로 있으면 남편이 나에게 뭘 해줄 필요가 없어진다. 내가 나를 24시간 어장속에 있는 물고기로 만들어버렸는데 남편에게 다잡은 물고기 취급하냐고 따진다면 의미가 없다.
남편에게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 남편의 남자다움을, 남편의 영웅스러움을, 남편의 자상함과 섬세함을, 칭찬해주고 고마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먼저,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나를 위해줄 수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어야 한다. 남편이 나에게 구애를 할 수 있도록, 내가 남편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도록, 나 스스로가 바빠야 한다. 남편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이 콩밭에 미리 가 있어야 한다. (바람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내 인생에 집중하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