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는 섬이라 거대화된 동식물들이 많다. 공기 맑고 자연 환경 좋고 날씨 따뜻하고 적도 근처에 태평양 해류 덕분이 대기 속에 산소 농도도 높아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식물들이 살기 최적화 된 천국같은 섬이다. 그 천국에서 사는 벌레들은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포식자들도 무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월세내고 살 것도 아니면서 남의 집에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자기주장 강해서 제 갈길을 간다.
예전에 기숙사에서 살 때, 기숙사 부엌 천장에 진짜 어마무시한 크기의 거대거미를 봤었다. 그 거미는 몸통도 엄청나게 크고 다리 여덟 개는 너무 길고 컸으며 그렇게 큰 벌레는 일평생 한 번 볼까말까하는 크기였다. 벽에 붙었더라면 다리까지 해서 거의 문 한 짝을 다 덮을 크기. 실제 스파이더맨보다 더 큰 거미. 진짜 과장 아니고 농담도 아니고 정말 그만큼 컸더랬다.
그 거미를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걷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가고 온몸이 굳어버렸고 이 거미가 나에게 달려들까 나를 물까 공격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가 조용히 뒷걸음질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왕거미는 꽤 오랫동안 그 천장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해도 부엌에서 요리도 하고 공동공간에서 모임을 하고 떠들고 해도 거미는 그냥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은 우리는 다 같이 지구에서 공생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딱히 벌레를 잡아야한다는 생각도 없어서... 그냥 내가 그 부엌을 피해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 저기 멀리서 그 거미가 있나 없나 확인했는데 있으면 있는대로 무서웠지만 안보이면 보일 때 까지 계속 찾게 되었다. 없어지면 이게 어디로 갔는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가 더 무서우니까 차라리 같은 곳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나는 기숙사 공동공간을 지나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바로 그 거미가 공동공간의 벽에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짙은 갈색의 거대한 몸통과 쭉쭉 뻗은 다리들, 자세히 설명하기에도 등골에 소름이 돋고 뒷목이 쭈삣거릴 정도인 그 거미를 무방비 상태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1층에 내려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거미를 찾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 뒤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왜 벌레가 무섭다고 느꼈을까? 나는 왜 벌레가 나오면 안된다고 믿었을까? 나는 왜 우리집은 벌레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거미가 가끔 생각이 난다. 기숙사에 있었을 때는 다른 기숙사 사람들도 많았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겠지만, 만약 깜깜한 길거리에서 그 거미를 처음 만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근데 솔직히 길에서 보면 그게 너무 커서 거미라는 생각도 못할 것 같다. 아니면 진짜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내 방에서 봤다면? 하...
해충를 포함한 모든 동식물과 공생하는 이곳 사람들과 살면서, 나의 벌레에 대한 공포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집에 ㅂㅋㅂㄹ나 다른 벌레들이 나오면 질색팔색을 하며 무서워하는 이유는 집은 내 공간이며, 내가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우리 집에는 벌레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으며, 그 믿음과는 반대로 벌레가 나오면 어떻게 할 지를 몰라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나는 공격 당한다고 벌레가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워하게 된 것 같다. 징그럽게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이게 날라다니면서 어디로 갈지, 또 언제 무방비상태로 출몰할지, 얼마나 있는지 모르니까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이 불청객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나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나는 벌레들이 안 나오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온갖가지 노력을 하면서 집을 유지관리하고 있으니까 그 노력이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마음이 큰 만큼 공포심도 컸다.
내가 멀리서 왕거미가 기숙사 부엌 천장에 붙어있으면 역설적이게도 안심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무서워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은 상당히 줄어든다. 그리고 내가 그 왕거미가 부엌 천장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찾으면 나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지만, 또 상황이 바뀌어 왕거미를 다른 공간에서 보게 되면 또다시 엄청난 공포심을 느끼는 것 처럼,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와이에 살면서 우리 집에는 벌레가 나오면 안된다고 굳게 믿는 것보다 벌레는 언제든 나올 수도 있으니 벌레약을 가까운 곳에 준비하거나 벌레를 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거나 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실 얘네도 날씨 좋으면 햇볕 쬐러 나오고 비오면 물마시러 나오고 더우면 시원한 곳으로 찾아가고 추우면 따뜻한 곳으로 찾아다니는 거다. 그냥 심심해서 이집저집 여긴 뭐 재밌는 거 없나 찾아다닐 수도 있고 배고파서 뭐 먹을거 찾아다니는 걸 테니까.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고 내가 가장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벌레가 나오면 안되기 때문에 또는 집안을 더럽게 하지 않기 위해 하루종일 눈에 불을 켜고 청소하더라도 결국 벌레는 나오고 먼지는 쌓이고 어디든 더러워질 수 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를 나 혼자 어떻게 이기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지 아무리 노력해봤자 나만 힘들고 안되는 것도 있더라.
내가 왕거미를 발견하고 느꼈던 공포심, 왕거미의 존재도 몰랐던 시절, 왕거미의 존재를 알고 회피하기 위해 했던 노력, 그곳에서 살기위해 왕거미와 공생해야 함을 깨달았던 순간, 왕거미를 거부하는 이유 모두 나에게 필요한 과정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왕거미의 존재를 목격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던 것처럼, 어느 한 사람도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람의 시각, 그 사람의 세상,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말과 행동들 모두. 함께 살기 위해서는 공생하기 위해서는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품고 가거나 갈라서거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정말 중요하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인정하고 내가 어떻게 대처할 지를 생각해놓기.
그러나 상황은 항상 그렇게 생각처럼 계획처럼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라고 이미 알고 있는 성격은 받아들이기는 쉬울 수 있겠으나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이 터진다면 내 감정을 내가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옳고 그름의 기준이나, 상식의 기준, 선과 악의 기준을 허물어트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게 되는 순간도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고 힘들어서 정말 다 놓아버리고 싶은 때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의 준비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놓쳐서는 안된다. 왕거미가 나타날까봐 전전긍긍하며 눈 앞의 꽃밭을 못 보면 내 손해다. 다만 내가 왕거미의 존재를 알고만이라도 있다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왕거미와 맞닥드렸을 때, 심장마비로 죽지 않을 정도면 된다. 내가 왕거미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할 지를 염두해둔다면 왕거미의 존재를 몰랐을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나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나의 중심을 잃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례하게 대한다고 해서 내가 내 기분을 망치게 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은 그냥 왕거미 같은 존재이다.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고, 내가 존재를 알고 나면 극심한 공포심 없이 존재를 확인하고 돌아나올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왕거미가 나타났다 해서 내가 왕거미를 공격할 필요도 깔아뭉개버릴 필요도 없고, 사실 그럴 깜냥이나 능력도 없다. 나는 내 중심을 잡고 내 좋은 기분을 유지하며 남은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되는 거였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가 연애할 때, 나는 당시 남친이었던 그 분이 아플 때 죽을 끓여주거나 곁을 지키며 상태를 살피거나 하는 방법으로 간호를 해주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내가 아플 때 그 분은 비타민을 주거나 내가 사다달라고 하는 약을 사주거나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것이 끝이었다. 말로는 너가 정말 걱정돼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 푹 쉬어 그래놓고는 저녁에 지역축제에 가서 놀면서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었다면서 사진을 보낸 것. 당연하게도 다음 날 너는 내가 아프다는데 신경도 안쓰냐고 여자친구가 아파 누워있는데 간호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축제를 가고 싶냐고 이딴 사진은 대체 왜 보내냐고 대판 싸웠다
나는 왜 그랬을까. 우리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누가 아프면 그렇게 해줬으므로 당연한 것. 그러면 남편도 마찬가지로 시부모님이 그가 어렸을 때 부터 그렇게 해줬으므로 그가 아는 한 그것이 최선이었던 것.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나를 간호해주고 진심으로 걱정을 표현했고 자신이 축제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것을 나와 공유해주고 싶었고 나도 사진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것이었다. 아 남편은 그런 지극정성의 간호를 받아본 적이 없구나. 남편의 부모님은 아들이 아파서 누워있어도 부모님의 일과를 우선시하고 부모님의 인생을 사시는 분이셨나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정성어린 돌봄을 주고 받는 그 따스한 마음을 모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아파서 혼자 끙끙 앓았을 어린날의 남편이 조금 짠하다.
상대가 한 말을 단어 그대로 듣고 그 의도를 그가 설명한대로 인정한다면 싸울 일도 없겠지만 사실 마음이 그렇게 되질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르게 본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고 그것이 틀렸다고 닥달해봤자 내가 얻는게 뭐가 있을까.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나는 이미 아팠고 그 사람은 이미 다 놀고 왔고. 내가 다음에 아팠을 때 이 사람이 엉거주춤으로 나를 간호해준다고 해봤자 지난 번에 축제가서 놀고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때 내가 화를 내고 난리쳐서 이 사람은 지금 어쩔 수 없이 나를 간호한다는 꼬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고.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일까? 그런다고 그냥 너 하고싶은 대로 해라 하면 내가 다음에 또 아플 때 이 사람이 나가 논다고 하면 내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그래 나가 놀아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아픈데?
나는 결국 나의 감정기복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중에 나만의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상대의 진정성을 평가하고 내 기준에서 너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바가지를 긁은 것이다. 내가 원하는 애정표현은 ㄱ ㄴ ㄷ 이였는데, 남편이 알고 있고 해줄 수 있는 표현은 A B C 였던 것. 나는 ㄱ ㄴ ㄷ 의 존재조차 모르는 남편에게 그것들만 강요하고 남편이 열심히 보여줬던 A B C 의 존재를 인정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나는 외국인 남편과 사귀는 데 문제될 게 업사고 생각했는데,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이내일 뿐이었다. 나의 시야가 좁았고 나의 생각이 짧았고 나의 그릇이 작았었다. 그 밖에는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의 모든 (나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특이점을 인정하고, 그의 그런 면들이 왕거미처럼 언제 어디서든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은 보인다. 우리는 공생해야 하며, 그도 행복할 수 있고 나도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