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선임 부장님과의 대화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시원했다.
이거시 연륜인가. ㅜㅜ
체계적이고도 건설적인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부장님 덕분에 퇴사 안 하고 버텼다.
“So, the answer to your question is...”
회의시간, 팀장님의 장황한 설명을 들으며 산으로 가다가도
그 끝에 부장님께서 딱 정리해 주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거입니다.”
“저렇게 처리하세요.”
“네,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아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우리의 권한 밖이에요.”
그럼 진짜 속 시원...
“Nothing YOU need to worry about...”
어떤 안건에 대해 팀장님께서 본인이 담당하는 부분만 주구장창 설명하면,
매듭지어지지 않은 나머지 자잘한 부분들이 항상 남아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또 뭐라 할까 봐 그 부분들에 대해 자꾸 질문하게 되었던 것.
“임원급에서 결정이 될 일입니다.”
“내 선에서 처리할 테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처리해 주세요.”
이렇게 대답을 들으면 바로 납득된다.
이건 정말 정말 배우고 싶은 능력 1순위.
팀장님과 대화하다 보면 굉장히 체계적인 대화를 한 것 같다.
클라이언트랑 3시간 대화 한 내용이 팀장님과 3분 만에 정리되고
어느새 결론이 나와있음.
그래서 가만히 보니 이거 정말 능력이시잖아?!
1) 효율적인 시간 분배
“지금 회의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으니 다른 주제를 먼저 논의합시다.”
“그 안건 자세한 내용은 우리 모두가 이메일로도 전달받은 상황이니 업데이트된 부분만 언급합시다.”
중요도나 시급성에 따라 대화의 순서를 바꾼다.
-> 포인트는 그때 상대가 말하고 있던 주제를 언제 다시 논의할지 정하고 넘어가는 것. 그러면 상대 역시 무시당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2) 상대가 한 말을 간결하게 정리
- 상대의 말을 듣고 모두 이해했다고 알릴 수 있음. 그러면 나도 비슷한 말로 계속 반복 설명할 필요가 없다.
- 우리 회사의 용어를 사용해서 정리. 정부 정책이나 각 회사의 서비스 정책 등 공식 명칭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게 항목을 짚어줌. 그러면 나도 어떤 과정으로 일을 해야 할지 감이 확 온다.
- 핵심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효과.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그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릴 수가 있는데, 우리 회사 이념을 중심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상기시킨다.
-> 그러면 그동안 내가 걱정해 왔던 일들이 싹 사라짐.
3) 질의응답을 통해 방향 설정
질책하거나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예를 들어, 어느 부분에 한해 설명이 부족하다면 부연설명을 요청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 A사의 입장은 이러이러하다면 B사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업무와 크게 관련이 있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연관성을 질문한다.
“그 부분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겠어요?”
“그 내용이 이 상황에 어떻게 연관됐는지 설명해 주세요.”
단순하게 사원 급에서 해결 가능하다고 보이는 결정사항은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요?”
“실무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요?”
어느 부분에 대한 컴플레인이 길어진다면 빠르게 결론으로 넘아간다.
“그래서 고객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요?”
“그쪽에서는 어떤 해결방안을 제안했나요?”
1) 상대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도 긍정문으로 요약
“당신이 이러이렇게 생각한다는 건 잘 들었어요.”
-> 문제에 대한 동의는 아니지만 너의 이야기는 내가 경청했다는 사실을 알림
“그런 걱정은 일리 있습니다.”
-> 너와 나를 분리하면서도, 너의 심정은 이해하겠다는 사실을 알림
2) 한 팀이라는 걸 강조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이 사안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아요.”
“고객과 지역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매일 이렇게 일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이 일을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아주 조그마한 공통점이라도 찾아서 언급함.
어쩔 땐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서 팀이 와해되거나 균열이 생길 수도 있는데,
우리가 이 회사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줌.
결국 우리는 한 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팀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끝에도, 여러 번의 거부 끝에도,
부장님이 팀장님한테 성공적으로 (사실상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를 배정했다는 거.
회의 분위기 서늘했다 진짜...
3) 대화의 마무리는 미래지향적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면”
“앞으로 더 나아질 부분”
당장의 문제보다는 회의에서 도출된 해결책을 강조하면서 마무리.
지금 잘못된 일들을 설명하기보다, 앞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강조.
개개인에게 약간의 희망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부서 전체 인원으로 보면 큰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직원들과도 개별적으로 면담하며 상태를 확인해 주신다.
일 하는 데 필요한 건 없는지
특정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팀 단위 업무에서 제안사항이 있는지 등등
직접적으로 불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안을 질문한다.
그리고 일 외에도 사적인 부분을 먼저 말해주시며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도 해주심.
그리고 마무리는 당연 직원으로서/개인으로서의 장점을 언급해 주며 훈훈하게 끝난다.
이 장점이 어쩌면 단점이 될 수도, 어쩌면 아주 당연할 수도 있는데 업무에 연관 지어 칭찬해 주심.
한 명 한 명에 진심으로 관심을 주어 사소한 일들도 포착한다.
그동안 팀장님의 본인 업무범위에 대한 설명을 반복해서 들으니
내 마음속의 답답함이 쌓이고 쌓인 데다가,
일이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할 지에 대한 불안감에,
나에게 책임이 전가될까 봐 방어적으로 취했던 태도,
그리고 팀장님은 저 일을 하자고 그렇게 높은 직급에 높은 월급을 받으시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가 여기서 이러고 일하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부장님의 답변은
어쩌면 욕심이 많은 사원에게는 본인 일에 한계를 긋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직급이 그런 걸 어쩌나.
회사에서도 사원급에게 책임을 물게 해서 꼬리 자르기를 하지 않는 한
신입사원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이런 결정은 윗선에서 정리해 줘야지!
맞아, 이 부분의 책임과 권한에 적합한 자리가 있었지!!
아하, 회사가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이게 정상이구나?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겨우 나도 눈이 떠졌다.
아 그동안 나도 굉장히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었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팀장님의 화법도 어쩌면 다 이유가 있었다.
팀장님이 맡으신 업무 중 특정 일에 특화된, 그 분야에서는 굉장히 효과적일 수 있을 법한 화법인 것 같다.
부장님의 대화 스킬은 잘 배워뒀다가 활용하고 싶다.
1:1 대화뿐만 아니라 회의에서도, 미팅에서도, 직장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도.
내 직장생활에 롤모델이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다!
나도 이제부터 조금씩 바뀌어야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무리 외국에 오래 살았건,
얼마나 많이 영어공부를 했건 간에
원어민의 장벽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법을 완벽하게 알더라도 그 문법 뒤의 무의식적 사고체계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단어를 무수히 많이 암기했더라도 그 외의 숙어나 관용구는 그만큼 자연스럽기 힘들고
발음을 정확하게 하더라도 그 발음 속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법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안의 뉘앙스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쉬운 단어만으로도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고 이해했다는 것을 요약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발음에 악센트가 있더라도 상대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공통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가 서툴러도, 핵심을 관통하는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멀리 보고 길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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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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