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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Oct 20. 2021

예쁜 말의 위력

보카

나는 내가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미국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미국 사람들, 미국인의 문화와 그들의 사고, 그들의 삶의 방식과 인생철학 등등. 내가 다닌 국제학교는 미국 교육과정이 아닌 국제 과정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당시 한국인들 제일 많았지만 서양인들만 보면 유럽권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학교에 미국인의 수가 현저히 적어서 일 수도 있고.


아무튼 나는 미국을 그냥저냥 내 기준에서 받아들일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드를 봐도 미국인들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뭐 드라마니까 설마 진짜 저러겠어 싶은 안일한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세계 강대국 천조국이라는데 당연히 정상인들이 더 많겠지 싶었다.




이 곳에서 살면서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차이점은 영어권의 문화 내에서도 얼마나 차이가 큰 지 였다. 발음의 차이, 스펠링이나 단어, 문법, 이런 드러나는 차이도 있지만, 실제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심리상태? 랄까 추구하는 가치관? 세계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랄까? 아무튼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나는 차라리 영국에서 공부했을 때 오히려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지금보다 더 형편없었지만 뭔가 말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만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당시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남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대로 글로 설명이 될 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었던 바로는 그 대화의 결이 맞았던 것 같다. 약간의 불평, 약간의 겸손, 약간의 현실자각, 약간의 걱정근심, 약간의 신세한탄, 약간의 자조적인 그런 말투, 그럼에도 그 안에 해학이 있는? 냉소적이지만 따뜻한? 어쩔땐 비꼬기도 어쩔땐 돌직구를 날리기도 어쩔땐 돌려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말 뜻을 알아듣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말투나 생각에 익숙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걸 영어로 번역해도 그 대화의 흐름 안에서 어울려 흘러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농담을 해도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은 나만의 느낌? 그들의 병맛같은 개그도 차라리 더 웃겼다. 부정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야 그거에 대한 대비도 하는거고, 불평불만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거고, 현실을 파악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거니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지하는 것, 여기서부터 생각의 시작점이 같았다. (비슷한 주제로 영국인 칼럼니스트가 미국에서 살면서 쓴 글도 있다. https://www.vox.com/first-person/2016/10/4/13093380/happiness-america-ruth-whippman)




그런데 내가 이민와서 하와이 뿐만 아니라 중서부 사람들 (동부는 모름) 과 대화하면 진짜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이 든다. 아 하면 어 하고 어 하면 이 하고 그렇게 대화가 통해야하는데, 여기는 아 하면 아하하 어 하면 어허허 이 하면 삐유유우우우웅 하고 대화가 진전이 안되는 느낌. 물론 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들 열심히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없겠지만... 내가 겪은 미국인들은 대부분 정말 낙관적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을 것. 그런데 진짜 소름돋게 무서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완벽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행복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충분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만족한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을 때 이러이러한 현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저러한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그 면에 집중하자 이렇게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냥 정말로 진심으로 지금 이대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다. 그게 진정한 자존감인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자신의 기준에서는) 완벽하다 이거를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가 없다. 예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완전체라는 존재처럼. 


그래서 뭔가의 특혜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어느 자격이 있어야 된다고 나에게는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자신이 자격이 되지 않더라도 특혜를 받을 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뭔가를 성취하려면 뼈를 깎는 노오력을 해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나에게 그 성취된 결과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물론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성적이 나빠도 배경이 안좋아도 행복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몇몇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게 무서웠다.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것이. 그리고 타인도 거기에 맞춰서 행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잠재력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냥 지금 여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게 정말 두려웠다. 죽어라고 노력해도 안되서 희망이 없는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해서 발전의 필요성조차 부재인 상황이 무서웠다.


이게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닌데, 내가 그들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니 온 몸에서 거부반응이 오는 것 같다. 나의 미래가 이럴 것이라는 게, 앞으로도 쭉,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건이 없다면, 이 상태로 변화없이 가는 게 정말 충격적으로 무서웠다. 희망이 발전이 없는게 무서웠다. 물론 죽어라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대단한 성공을 이룩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건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을 응원해주고 축복해줄 줄 알아야하는데, 내가 꼰대가 되었나? 내가 뭐라도 된다고 감히 어떻게 그 사람들을 평가할까. 여기서 살려면 나도 그들처럼 적응해야 할까? 그러면 여기서 살면서 마음은 편할듯. 하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걱정근심 불평불만이 디폴트였던 내가 햇빛받고 몇 년을 더 살아야 긍정충이 될 수 있을까? 그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내 오만방자했던 생각을 바로잡아준 일이 있었다. 







올해 초, 나는 정말정말 외롭고 심심하고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이리 찍접 저리 찍접 대며 뭐 재밌는 거 없냐고 어디 놀러가자고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며 보는 사람마다 질척댔다. 그리고 온라인 모임 오프라인 모임도 나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고. 암튼 마음이 공허해서 채워지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에게 사람들 만나고 같이 공부하고 그런 모임이 있다며 한 번 나와보라고 누가 소개를 해줬다. 나는 그 사람은 신분이 보장된 사람이기에 당연히 아무 의심 없이 꼭 간다고 했고 그게 공부하는 모임이라 책을 읽어야 참석할 수 있다고 해서 책까지 받아놨었다. 그리고 여자처자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강연을 듣는 기회가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참여했다.


그 모임의 사람들은 정말 예쁜 말들을 주고 받았다.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다. 가족과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의미있는 삶이다. 너의 인생은 소중하다. 너는 그 인생에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너의 인생은 앞으로 승승장구 할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서로서로 도와가며 성장할 것이다. 등등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쏙쏙 해줬다. 나도 너무 공허한 나머지 뭔가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말이 귀에 찰떡같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나를 번뜩 정신차리게 해준 것은 다름아닌 강연의 내용 중간즘에 나온 암웨이라는 기업의 이름이었다......ㅋㅋ 


나는 그때까지도 이 모임이 뭔지도 모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심취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남편은 해주지 않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 그 분위기가 너무너무 좋았다. 코로나였으니 천만다행이지 만약에 실제로 오프라인 모임을 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악수하고 포옹하며 인사했다면 외로움에 사무쳐 사람이 그리웠던 나는 그 모임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다고 사인까지 했을 판이었다.


어디서 읽었는데 자신의 젊음을 바쳐 자식들을 키워놨더니 연락 한 통 없는데, 다단계 직원들은 멀끔하게 정장 빼입고 와서 어머님 아버님 하면서 어깨도 주물러주고 말도 걸어주고 주기적으로 찾아뵙고 안부도 물어주고 하면서 어르신들이 원했던 자식노릇을 해주니 사기인거 알면서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적적하셨으면 그렇게라도 인기척을 느끼고 싶었을까 싶었는데 내가 그 수준까지 갔다니 나는 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그리고 나는 예쁜 말의 위력을 깨달았다. 시니컬하게 말해도 되지만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하고,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발전의 의지가 없는게 아니라 지금 열심히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기회를 더 나은 도전을 위해 천천히 준비중이었다. 


영국 영어든 미국 영어든 한국어든 어느 외국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더라도 사실 상황은 똑같다. 어디를 보고 어디를 설명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화자의 선택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정말 예쁜 말의 위력이 있다. 감언이설이든 빈말이든 선의의 거짓말이든 간에 듣기 좋은 말이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는데. 말로 하는 건 돈드는 것도 아니고 예쁘게 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사기를 치려면 그정도 노력은 해야지 외로운 사람들 적당히 포섭해서 말만 잘해주면 돈 가져가라고 아우성인데. 괜히 보이스피싱으로 협박해서 돈 뺏어가는 것보다 사기칠라면 예쁘게 말하는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거 같다. 


북풍과 태양처럼, 당근과 채찍처럼. 햇볕주고 당근주고만 하면 그게 더 효과적일까? 단점에 집중하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면 받아들이기에 마음이 더 편할까? 우리는 아무리 복장터지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에 집중할 수 있을까? 내가 이사람 돈떼먹으려는 목적이 없이도 상대에게 좋은 말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칭찬에 인색하고 감정표현에 어색한데 나는 연습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많은 꽃들과 억새가 예쁘다 해도 성균인 그대들만 할까요? 그대들은 다 내 아들과 딸이므로 매일 아침 청소를 깨끗이 하고 있으니 발로 뚜껑 열지 않았으면 해요. 항상 깨끗하게 이용하는 그대들이 있어 기쁘게 청소하고 있는 아줌마가 드리는 글. 발로 변기를 열지 마시오 라고 무미건조한 안내문도 메세지는 전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예쁜 말 한마디였다. 그리고 며칠 만에 그 글에는 수많은 응원과 반성과 감사의 인사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 예쁜 말이 수십명의 마음에 와닿았다. 나도 그렇게 예쁜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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