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드르드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진동벨이 울렸다. 나는 젖은 앞머리를 털며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점원에게 짧은 목례를 건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창밖에는 난데없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살까 했지만 더 이상 편의점에서 비싸기만 한 싸구려 우산을 사고 싶지 않았다. 현관 옆에 쌓아둔 비닐우산들은 애물단지였고 금방 그칠 것 같은 비 같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참, 비 한번 대차게도 내리네'
가만히 앉아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4년 전 그곳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꽤 지쳐있었다. 그 순간을 살아가던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를, 그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꾸지 않던 꿈을 꾸고 무언가에 끊임없이 쫓기며 불안한 마음이 넘실대던 날들이었다. 그때 나는 폭풍으로 굽이치는 진회색 빛 파도에 잠겨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다 삭아버린 방파제와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회사 사람의 책상 위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처음에는 나무 사이 햇살을 받으며 서있는 오두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와 통유리로 지어진 조그마한 카페 같아 보였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따스한 모습이었다.
"민진 씨. 여기는 어디예요?" 내가 사진으로 눈길을 건네며 물었다.
"아 여기요? 도쿄예요. 도쿄 기치조지."
"아.. 도쿄.. 참 예쁜 곳이네요."
"그렇죠. 대리님도 한번 가보세요. 연차도 거의 안 쓰셨잖아요."
"정말 그럴까요. 요즘 어딘가 가보고 싶던 참인데.."
민진은 그러라는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진과의 대화는 거의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다. 나는 살짝 뻘쭘함을 느끼며 자리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안에 섞인 기분이 좋더라고요"
등 뒤에서 들려온 뜻밖의 음성에 놀라며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그 안에 속해있는 게 좋았어요. 전부 다요."
민진은 나와 짧게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짧은 대화는 지금껏 그녀와 나눈 가장 긴 대화였다.
그녀를 뒤로한 채 내 자리로 돌아오며 그곳이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특별하거나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고 그곳에 앉아 나도 그 풍경 속의 한 조각이 되어보고 싶었다.
서둘러 휴가 신청을 하고 비행기 편을 알아봤다. 도쿄는 처음이었다. 그 유명한 쇼핑거리도, 커다란 랜드마크도 아닌 작은 카페가 이 출발의 목적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나를 그곳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다음 주 수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바로 기치조지로 향했다. 어차피 거창한 짐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기치조지는 도쿄 중심부에서도 1시간 이상 떨어진 조그마한 지역이었다. 지하철 창문 밖으로 일본 특유의 감성들이 묻어나는 풍경들이 스쳐갔다. 소담한 마을과 집들을 지나치며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눌린 채 몰아치던 무언가를 잠시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역에 도착해 먼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관광지 특유의 싸구려 맛이 나는 라멘으로 허기만 때운 후 발걸음을 옮겼다. 양손에 가방을 든 채 이 조그만 지역의 모든 걸 담아 갈 기세로 쇼핑을 하는 관광객들 사이를 지나쳤다. 시간은 벌써 늦은 오후였고 머리 위로 해가 가려진 건지 져 가는 건지 모를 흐릿한 하늘이 떠있었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다.
지도를 켜고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카페는 이노카시라라는 공원 한가운데에 위치해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공원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걸을수록 사람들은 뜸해지고 더욱더 울창한 나무들을 마주했다. 마치 출구 없는 숲 속을 우두커니 방황하는 듯했다. 흐릿했던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목적지를 향해 맞게 걸으면서도 헤매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툭투둑투두두둑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어깨 위로 하나둘씩 떨어졌다. 한두 개였던 빗방울은 금세 빗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소나기였다. 공원 내 간이 편의점에서 싸구려 비닐우산을 사서 썼다. 난데없는 비에 공원 바닥은 서서히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제기랄…”
작은 욕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곧 굵은 빗줄기는 하얀 직선이 되어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짙은 초록색의 빼곡한 나무들과 하얀 직선이 만나 온 풍경에 마구 스크래치를 남겼다. 마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에 상처를 입히려는 듯. 난 이런 풍경을 상상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 다그치던 상황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온 곳이었는데 이곳 전체가 아니 세상 자체가 침잠하는 듯 느껴졌다. 그 한가운데서 나 또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기어이 이 빗줄기는 내게도 상처를 입혔고 외면하던 감정들은 최후의 방파제를 뚫고 무너져 내렸다.
어쩌지 못하는 나와 더불어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공원 군데군데에 위치한 자그마한 간이 상점 앞에서 기다리던가 아니면 그냥 빗속을 걷는 것뿐이었다. 난 후자를 택했다. 이왕 젖기 시작한 거 차라리 흠뻑 젖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난 싸구려 우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공원 안으로 유약하게 걸었다. 흙바닥에 진한 발자국을 새기며 공원 안을 걸으면서 팔과 어깨로 미처 피하지 못한 빗방울들이 배어 나왔다.
얼마 정도 걸었을까.
시끄럽던 빗소리가 아득해지며 빗방울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구름은 지나갔지만 날은 저물어 어두워져 있었고 그 속에 잠겨버렸던 세상은 수면 위로 다시 들어 올려졌다. 세상은 아래로 아래로 남은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나도 함께 서서히 떠올랐다. 멎어가는 비에 몰아치던 감정의 파동도 조금씩 진정되는 듯했다.
그 순간 저 멀리 나무 사이로 사진 속 카페가 보였다. 길을 찾지 않았지만 잃은 것도 아니었나 보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들을 피하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웅덩이 속에는 외면하던 어떤 것에 푹 절여져 흠뻑 젖은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いらっしゃいませ”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인사를 했다. 우산을 접고 걸어온 뒤를 돌아보았다. 통유리로 된 나무 건물 속에서 보는 공원은 생생했다. 자리를 잡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고 얼마 후 점원은 짙은 검은색의 커피를 내어주었다. 뜨거운 커피를 입속에 머금자 작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무언가 다 잃어버렸다가 작은 것 하나를 다시 움켜쥔 기분이었다.
민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불완전함 속에 있는 기분이 처음으로 썩 괜찮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봄도 여름도 아닌 계절이, 비가 그치지도 내리지도 않은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