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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Sep 12. 2024

소설 상록수에 나올 것 같은, 오래된 골목의 고깃집

128. 서울 용산구 청파동 상록수

비슷한 연배의 여느 학력고사(?) 수험생들처럼 초빼이도 '심훈=상록수=농촌계몽=1935년'과 같이 도식화하여 시험 문제의 답을 채우기 위해 외웠던 것이 전부였던 작품이 바로 '심훈의 상록수'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고3 시절엔 읽어보지도 못했던,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겨우 손에 잡았으나, 그 마지막 페이지까지는 넘기지도 못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초빼이도 어지간히 '책 읽기'에 인색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시절과는 조금은 결이 달랐던 '계몽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약간의 진부함이 초빼이의 인내심을 빠르게 갉아먹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젊은 문화 기획자(또는 활동가)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활동과 그들의 노력이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박동혁과 채영신'의 행적과 유사함을 느낀다. 시대적 배경은 90여 년이 흘러 21세기가 되었고, 활동무대는 농촌에서 도심으로 바뀌었으며, 그들이 소구 하고자 하는 대상은 글을 몰랐던 농민들에서 문화를 체험하지 못하는 도시민으로 대체되었을 뿐 무엇하나 다를 바 없다. 소설 속의 농촌에서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해 글을 읽지 못했던 문맹(文盲)'이 현실 세상의 '팍팍한 삶의 무게로 문화(文化)를 경험하거나 즐기지 못한 이 시대의 새로운 문맹(文盲)'으로 자리바꿈 한 것일 뿐.(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사실 상록수라는 이름을 다시 기억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초빼이답게, 어느 날 상록수라는 이름의 고깃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용산구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오래된 건물에 자리 잡은 이 고깃집은 초빼이도 사실 굉장히 오래된 노포인 줄 알고 찾았던 집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간판에서부터 뜬금없는 상호인 '상록수'까지 노포의 포스가 물씬 풍겨 나오던 곳이었다. 심지어 건물까지 노회 한 곳이었으니 노포라 오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곳. 하지만 2020년에 문을 연 그리 오래지 않은 업소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옛 직장의 동료 두 분과 오랜만에 만났다. 비록 현장의 문화기획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분들도 여전히 음악을 매개로 시민들과 교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이들이었니 그 옛날 박동혁과 채영신에 비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 두 분과 '상록수'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 색다른 의미도 부여할 수 있을 듯하여 이곳으로 자리를 청했다. 

이 집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라는 황지살을 먼저 테이블에 올렸다. 형태로는 광장시장의 노포 오라이 등심의 '동그랑땡'을 떠오르게 하는 외향. 동그랑땡은 등심을 말아 급랭한 후 얇게 슬라이스 하여 고추장 양념을 입히는데 반해 상록수의 황지살은 항정살 부위를 동그랗게 말아 조금 두텁게 잘라냈다는 것이 차이이다. 


원래 '황지살'이라는 말은 충청도 사투리로 돼지 머리 부분의 뽈살, 두항정살, 혀밑살이 붙어 있는 부위를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항정살과는 조금 다른 부위이다. 원래 항정살은 돼지의 목덜미 부분의 살을 부르는 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돼지의 머리와 목을 연결하는 부위로 앞다리의 어깨 쪽에 붙어있는 살. 많이 움직이는 목부분의 살이지만 연한 분홍색의 살에 근내 지방이 잘 분포되어 '마블링'이 좋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설화저육(雪花猪肉)'이라 부르기도 하는 부분. 게다가 '설걸설겅'거리는 식감도 좋아 예전에는 중국집 탕수육의 재료로 많이 쓰이기도 했다. 


잘 말아놓은 황지살을 불판에 올리니 잔뜩 웅크린 몸을 펴기 시작한다. 바로 옆에선 잘 무친 콩나물과 고사리가 익어가는 냄새를 솔솔 피워 올린다. 노랗게 익어가는 양파의 단면들이 특유의 단 냄새를 피워 올린다. 황지살에서 흘러내린 기름이 조금씩 콩나물과 고사리의 밑을 파고들며 더욱 강한 향기를 끌어올린다. 동그랗게 말아 놓은 고기가 몸을 쭉 펴면 그때가 뒤집어 줘야 할 시간.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고기의 단면이 자연스럽게 소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게 한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손을 놀릴 순 없다. 옥수수와 다른 야채를 넣고 만든 사라다(샐러드)가 입에 쏙 들어온다. 입 속에 남은 단 맛이 딱 좋다. 9월의 폭염을 뚫고 온 동료들에게 시원한 맥주와 소주를 함께 내준다. 이 집의 찬들은 과하게 시거나 과하게 달지 않아 좋았다. 고기가 익기 전까지 소주 한두 잔 하기엔 딱 좋은 애피타이저 같은 안주들이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묵은지(씻은지)가 좋아 보여 가위로 자른 후 안주로 곁들였다. 조금 더 익혔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다. 그렇게 술잔이 몇 순배를 도니 황지살은 딱 먹기 좋게 익어 있었다. 


고기 한 점을 들어 이 집의 특제 소스에 찍어 입에 넣는다. 서투른 젓가락 질이지만 양배추 한 조각과 미나리 조각 하나도 고기 위로 덧댄다. 기름이 적절히 빠져나간 황지살이 입에 착 감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함께 한 두 사람 모두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이야기의 첫 시작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주제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과 뜻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작한 캠핑 이야기까지 진도를 뽑았다. 차량용 트레일러를 구입하며 이런저런 장비들을 사 모으던 친구는 어느새 초빼이가 보유하고 있던 장비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다른 레벨의 전문 캠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가 초보캠퍼이던 시절 내가 소개해 주었던 '살둔마을 생둔캠핑장'을 아직도 애정하며 자주 다닌다고 너스레를 떤다. 서로의 기억과 추억이 함께하는 장소를 한 곳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두터운 유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직 캠핑을 시작하지 않은 다른 친구는 그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오두막에 묵으며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하니 새삼 부럽기도 하다. 언젠간 그 살둔마을 캠핑장 앞 개울가에서 셋이서 함께 몸을 담그고 맥주 한 잔 나누는 시간이 오겠지 싶다.

두터운 맥주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손에 들어오는 소주잔을 앞으로 놓았다. 금세 맥주병 몇 개와 소주병 서너 개가 좁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육아와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숨겨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다른 이들에 대한 험담도 빼놓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다른 이의 험담이 더 재밌었고 이야기하는 시간의 태반을 채웠다.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올 땐 맞장구도 쳤다. 때론 다른 이의 험담을 할 땐 더 과장되게 육두문자도 섞었다. 직장 생활에서 생기는 스트레스의 8~90프로는 사람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점점 우리의 얼굴엔 삶의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잔뜩 굳었던 얼굴은 어느새 환한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음성마저 반옥타브 정도 더 높아졌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의 뒷담화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린 아직 성공하지 못한, 미생(未生)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아직은 성공한 사람들과 같은 완생(完生)을 사는 삶은 아니지 않은가? 나중에 성공하면 뒷담화는 하지 않으면 될터. 아직은 여유가 있다. 소주 한 잔과 황지살이 있던 그 테이블 위에서는 아직 우리의 삶은 진행형이었다. 


황지살 5인분을 단숨에 먹어 치운 후, 이 집의 또 다른 인기 메뉴라는 비빔 수제비를 청했다. 비빔국수나 칼비빔과 같은 음식들은 이미 먹어봤지만 비빔 수제비는 처음 보는 메뉴였다. 그러나 직접 보지 못했어도 그 맛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수제비에서 그 파스타 면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알단테(Al Dente)'의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너무 부드럽게 푹 익혀버린 수제비라면 무척 실망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비빔 수제비 접시에 놓인 얼음 조각을 보며 비로소 안심했다. '그래 얼음조각까지 올릴 세심함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집의 대표 메뉴인 황지살만큼 비빔 수제비가 보인 무게감도 대단했다. 거기엔 얇게 채 썬 양배추와 갖은 가늘게 잘라놓은 김의 역할도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수제비를 삶아 이 정도의 식감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 부르지는 않지만 식욕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정말 균형 있게 만든 매콤 새콤한 양념장은 거기에 무엇을 비비던 모두 다 훌륭한 한 접시의 요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지살 등의 고기 요리를 먹은 후엔 반드시 주문해서 먹어야 필수 메뉴로 치부해도 좋을 같았다. 조금은 기름졌던 속을 말끔하게 청소한 느낌마저 든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는 앞으로의 삶으로 초점을 옮겨갔다. 사십 대 중반이었던 그들의 눈에도 미래에 대한 추측은 아직은 기대보다 두려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십 대의 중반으로 향하고 있는 초빼이의 모습은 아직 그들에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성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다른 이의 그것을 조금씩 인용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는 그 자체로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오히려 확정되지 않았기에 하나씩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직 우리의 삶은 진행형이다. 


이 상록수라는 음식점도 우리와 형편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굉장히 오래된 가게 같아 보였지만 아직 5년이 되지 않은 신생 업체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어떤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으니 유지와 관리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정말 좋은 노포'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될 시간이 올 것이다. 마치 우리가 꾸준히 자신의 삶을 살다 보면 '그 사람 정말 괜찮았지'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고기판 위에 한두 점의 고기만 남게 되었다. 직원분께 볶음밥을 요청하였으나 밖에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그만 자리를 양보해 주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문 밖에서 잠시 기다릴 때 웨이팅이 길 때면 테이블 당 체류시간을 두 시간으로 제한한다는 글귀를 보았던 것 같다. 뒷사람들을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에서 정한 영업방침이니 그것을 따르는 것 또한 손님으로서의 의무일터.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늘 못 먹었던 음식은 다음에 또 찾아와 먹으면 된다. 굳이 얼굴을 붉히며 무리할 필요는 없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손님들이 가게의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으면 누가 이들을 생각해 줄 것인가? 


진득하게 고기냄새가 온몸에 스며들어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향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며 옆을 지나는 다른 이들의 고개를 우리 쪽으로 돌린다. 이 집 고기향수 꽤 효과가 좋다. 더구나 남자들은 좀처럼 가기 힘든 여대(숙명여대 근처) 앞이니 가슴 뿌듯하기도 하다. 숙대 입구의 치킨집에서 가볍게 목을 더 축이고 헤어졌다. 적어도 우린 내일까진 이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오늘도 온몸에 고기향수를 뿌리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 전철역으로 향한다. 


* 참고 1. 초빼이의 노포일기 - 경인편, 지방편은 전국 대형서점 오프라인에서도 구입 가능합니다.

  -  9월 12일 [예스 24] 음식에세이 분야 판매량 3위, 4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 참고 2. 초빼이의 노포일기 출간기념 북토크가 9월 21일(토)에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과 신청은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북토크 신청 : https://linktr.ee/alone_around?utm_source=linktree_profile_share&ltsid=ec2c0f19-f23e-4117-a5a4-b259254e93d4 


 [메뉴추천]

1. 2인 이상 방문 시 : 황지살 + 비빔수제비(또는 볶음밥) + 소주

2. 3인 이상 방문 시 : 황지살 + 후추뽈살 + 비빔수제비 + 볶음밥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필요.

2. 월~일 15:00~24:00 / 라스트 오더 23시 

3. 참고

    - 18시를 조금만 넘기면 금방 웨이팅이 걸린다. 가장 안전한 시간은 17시 30분 정도

    - 웨이팅이 길 경우, 한 테이블 당 두 시간 시간제한이 걸림. 미리 숙지하고 들어가야 한다. 

    - 용산(숙대입구역 근처)이 본점인 듯하고 선릉점이 분점인 듯 하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포대포, 굴다리소곱창, 덕순루, 쌍대포, 털보집, 까치네, 정, 다사랑스테이크, 금강산, 맛나

      분식, 은성집 등  

    - 숙대 근처 치킨집이나 맥주집, 남영역 인근 등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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