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충남 서산시 읍내동 진국집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다.
그중에서도 주변의 흔한 한 그릇 음식을 내는 식당이 아닌, 반찬 하나하나 일일이 만들어 갓 지은 밥을 내주는 집은 요즘 정말 찾기 힘들다. 그래서 손맛 좋은 백반집을 마주치게 되면 이상형을 만난 듯,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더욱이 그런 백반집 중 지역의 특별한 향토 음식을 내는 백반집을 만나면 그날은 그야말로 럭키데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집의 문을 열기도 한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내는 집도 흔하지 않은데 다른 곳에서는 먹어볼 수도 없는 향토 음식까지 내는 곳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초빼이는 지방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의 특별한 음식을 내는 식당을 찾는 편이다. 특별한 음식이라고 해봐야 값 비싼 재료의 음식이 아닌, 그 지역의 환경과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그런 음식들. 메인 요리도 될 수도 있지만 조그만 접시에 담겨 나오는 반찬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음식에 대한 정보가 넘치는 요즘,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도 각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지역의 향토음식이 많다. 부산의 돼지국밥이나 밀면, 전라도의 김치와 육회, 마산의 아구찜이나 미더덕찜, 통영의 도다리쑥국, 서해안의 젓갈, 제주도의 돔베고기나 고기국수 등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음식을 내는 집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며 찾기 힘들어졌다.
몇 년에 한 번씩 10월에서 11월 경이면 충남 홍성군 광천면을 찾는다. 새우젓을 사기 위해서다. 새우젓은 초빼이가 살고 있는 인천부터 강화도, 강경, 신안 등 유명한 곳이 많지만 홍성군 광천면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 광천은 토굴에서 숙성시키는 새우젓과 라면 다음으로 많이 수출된다는 식품인 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광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타면 꼭 인근 지역의 노포를 찾아 늦은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들리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들린 곳은 서산의 게국지 전문점 진국집. 오랜만에 꼬리 하면서도 푸근한 게국지 국물의 묘한 맛이 그리워졌다. 무려 7년 만이다.
진국집은 서산시의 구도심 한가운데 있다. 진국집이 자리하고 있는 읍내동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서산읍이던 시절부터 이 지역의 중심이었던 곳. 서산 시청 근처에 있는 진국집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좁은 골목 안에 서 있었다. 7년 전 찾았을 때는 주차장도 찾기 힘들어 꽤 오랜 시간을 주차장을 찾기 위해 돌았던 기억도 있는데 지금은 근처의 유휴지를 이용해 주차장으로 운영하는 곳이 꽤 늘어나 주차장 찾기도 쉬워졌다.
7년 전 처음 방문했던 때보다 진국집의 간판은 더욱 녹슬고 바래, 이젠 그 이름도 제대로 읽기 힘들 정도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쩌면 "장사 안 하나 봐" 또는 "가게 문 닫았나 봐"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을 수준. 그래서 더 진한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 집은 이렇게 시간과 함께 늙어가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에 가슴 한켠 슬며시 고개를 들었던 불안감이 조금씩 침잠한다. 간판이 뭐 중요하랴. 지금껏 좋은 음식 내는데도 바빴을 텐데라는 면죄부도 스스럼없이 부여한다. 7년 전 함께 찾았던 마눌님도 녹슬어 버린 간판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옛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감정도 있을터. 양철 연통을 통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하얀 연기도 옛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나이 든 건물의 뒤틀어진 벽에 맞춰 슬며시 몸을 뉘고 있는 샷시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 연탄난로 곁에는 이 집의 1대 사장님(조이순, 80)이 지팡이를 양손으로 세운 체 앉아 계셨다. 7년 전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 우리를 반겨주던 바로 그 이였다. 주름은 더 늘어나고 기력은 떨어져 보였지만 그 무뚝뚝한 얼굴에 순간 내비치는 반가움은 사장님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만 알아챌 수 있는 몫이다. 점심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바깥 홀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원하는 자리에 앉으라며 2대 사장님이 밝은 목소리로 맞아주신다. 사소한 것만 잘 기억하는 초빼이는 7년 전 처음 찾았던 날 앉았던 자리에 짐을 풀었다. 여전히 직접 끓이신 보리차가 먼저 테이블에 오른다. 등 뒤로 타오르는 연탄난로는 진국집의 따뜻함을 거리낌 없이 내뿜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메뉴가 조금 늘어났다. 물론 게국지(백반) 메뉴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기억에 없던 세트 메뉴가 생겼다. 인건비와 식재료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시절이니, 그러려니 했다. 7년 만에 찾았다는 약간의 죄책감에, 원래 게국지(백반)만 2인분을 주문하려 했던 생각을 접고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세트 메뉴에 추가되는 음식은 보리굴비, 수육 그리고 제육볶음. 가장 무난할 것 같은 제육볶음 세트를 주문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장 바보 같은 메뉴 선택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직접 끓인 보리차를 들이켠다. 단단하게 채워진 맛과 구수한 보리의 향기가 좋다. 어릴 적 초빼이의 어머니는 집에서 보리를 직접 볶아 보리차를 끓여 주셨다. 가끔 보리를 태울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핀잔이 뒤따르기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올랐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진국집도 아드님이 물려받아 운영을 하신다. 7년 전 홀과 주방을 주름잡던 1대 사장님은 이제 따뜻한 연탄난로 곁에 자리를 잡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반겨주시는 역할을 한다. 아직은 1대 사장님의 얼굴을 보고 찾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리라. 2대 사장님은 정말 입담이 좋으신 분이다. 얼마 전 대전 취재 중 들렸던 호수식당의 사장님처럼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분이었다. 충청도 분들이 점잖고 말이 느리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충청도 사람들처럼 재밌고 말 한마디로 사람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없을게다. 7년 만에 왔다는 초빼이의 말에 "죽은 줄 알았슈~"라며 받아치는 2대 사장님의 대답에 빵 터졌다.
게국지 한 상이 나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봉'에 모든 찬이 담겨 나온다. 달라진 것은 추가된 세트메뉴의 제육볶음만 따로 갖다 주신다. 그 '오봉'의 중앙은 여전히 뚝배기 4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의 변하지 않는 기본 음식이자 메인 음식. 그 음식들은 게국지나 그 국물을 사용한 음식들이다. 나머지 찬들은 그때그때마다 달라진다. 때마침 초빼이가 찾은 날은 진국집이 김장하는 날. 그래서 찬으로 나온 음식 중에 절인 배추가 그대로 올라왔다.
"오늘이 김장하는 날이라 주방이 정신없죠?... 오늘 천팔백 포기 해유. 김치는 천 포기, 게국지는 팔백 포기"
네 개의 뚝배기는 기본적으로 게국지를 활용한 음식이다. 게국지 뚝배기 하나와 무와 호박을 넣고 게국지 국물을 넣고 조린 조림 하나, 게국지 향이 듬뿍 담겨있는 계란찜 그리고 들깨가루를 듬뿍 넣고 된장으로 끓인 들깨 된장찌개. 무엇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최강의 조합이다.
게국지는 충남 태안과 서산 일대의 향토음식이다. 일종의 지역 특산 김치와 같은 것.
절인 배추와 무, 무청 등에 게장 국물이나 젓갈 국물을 넣어 만든 음식을 칭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김장을 하고 남은 나머지 배춧잎이나 줄기 등을 다 끌어모아 꽃게가 아닌 박하지 등으로 만든 게장 국물이나 게장을 담고 남은 양념 등을 넣고 숙성시키는 음식이다. 요즘 태안의 관광지나 국도변의 게국지 전문점이라는 곳의 음식과는 전혀 다른 음식. 게국지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게국지가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꽃게탕에 김치를 넣고 끓여내면서 게국지라 부르며 비싼 값을 매긴다. 음식을 먹으면서 가장 마음 상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비싼 값을 치르는 때가 아니던가?
그런 이유로 진국집의 메뉴판과 벽에는 '게국지는 꽃게탕이 아닙니다. 게국지는 짭짜름한 지짐김치입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게국지를 내는 식당의 소리 없는 '일갈'이다.
게국지의 맛은 사람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게국지를 만드는 젓갈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게나 게장 국물(박하지, 칠게, 능쟁이, 황발이, 사시랭이, 꽃게, 새우 등)을 넣은 게국지는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좋고, 황석어나 밴댕이 젓갈을 넣어 담그면 구수하고 칼칼한 맛이 난다고 한다. 초빼이는 진국집의 게국지만 경험했기 때문에 게와 게장 국물을 활용한 게국지만 먹은 셈. 진국집의 게국지는 국물이 진하다. 잘 숙성된 게장 국물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기본적인 맛도 간장 게장을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맛과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면도 있다. 배추나 무청이 익어가며 게장국물과 함께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다. 보통의 젓갈류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보다는 조금 덜 꼬리 하지만, 갑각류로 만든 간장게장이나 젓갈에서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풍미는 남아 있다. 그래서 달콤하면서도 구수하다.
게국지뿐만 아니라 다른 뚝배기에 담긴 음식도 조금씩 게국지 국물이 들어있는 느낌이다. 계란찜은 게살이나 게맛살을 넣은 계란찜보다 더 진한 갑각류의 향을 품고 있고, 들깨 된장찌개도 연하지만 게국지 국물을 품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최고의 압권은(물론 기본 게국지를 제외하고) 호박을 넣고 졸인 조림. 여기에 게국지 국물을 첨가해 구수한 향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보통 꽃게탕을 끓일 때 향과 맛을 더하기 좋은 재료 중 하나가 호박인데, 진국집 조림의 강도는 꽃게탕에 넣는 호박의 그것보다 백만 배 정도 더 깊다. 비릿하지만 달콤하고 구수한 게장의 향과 호박의 향과 식감이 미치도록 잘 어울린다. 게다가 결대로 갈라진 호박 한 덩이를 따뜻한 밥숟갈 위에 올려(위 두 번째 사진 참조) 먹을 때의 그 풍미는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다. 미세하게 갈라진 결마다 게국지 국물이 듬뿍 스며들었으니 맛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마치 밥숟갈 위에 맛있는 노란 국화 한 송이가 제대로 피어난 듯한 시각적 만족감은 덤이다.
홀 자리도 금세 사람들로 채워졌다. 평일 점심시간이지만 진국집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바로 옆자리의 단체 손님들은 서산 현지인들인 듯하였는데 우리에게서 이방인의 느낌을 받았는지, 자신들의 게국지에 대한 추억을 너무나 친절(?)하게 하나씩 풀어놓는다. "파란 잎사귀가 없으면 그건 게국지가 아니쥬"로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요즘은 게국지가 모르는 애들도 많아요"라는 아쉬움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나누더니 나가버린다. 김장을 하고 남은 자투리 배추나 시래기 등을 가지고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밴댕이 젓도 넣었슈"라는 한 사람의 설명에 그 맛이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이 쓸데없이 친절한 양반들. 이 정도 지원사격을 해 줄 사람들이라면 이 집의 단골들이 분명하다.
세트로 주문했던 제육볶음도 정말 좋았다. 하지만 맛있는 제육볶음이야 조금만 신경을 쓰고 찾으면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맛.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문을 실패한 이유는 다른 사이드 메뉴가 더 좋았다는 것을 다른 분의 방문기를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민어과의 물고기인 부세(부세조기라고 부르기도 함)를 잘 말려 쪄 내는 보리굴비는 생각보다 더 튼실하고 맛있어 보였고, 잘 삶아 내는 수육에는 파김치나 톳나물을 무쳐 함께 낸다.(시기에 따라 파김치를 내기도 한다) 모험을 하기 싫어 무난한 메뉴를 골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최악의 악수가 되었다. 우리의 삶도 똑같다. 도전하고 모험하는 삶이 더 크고 찬란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장님의 입담에 밥상 위에서 웃음이 그칠 줄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난 게국지라 허겁지겁 먹다 보니 추가 공깃밥까지 주문했다. 어차피 하루종일 운전을 해야 하니 술은 진작에 포기했다. 게다가 이 집에서 내는 가장 좋은 안주인 '우럭젓국(반건조 우럭으로 끓이고 젓갈로 간을 하는 지리탕. 보통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 서해안 여러 지역에서 내는 향토음식)'이나 '우럭포찜'은 다음에 따로 서산에 내려와 술과 함께 먹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 못 마시는 술의 양만큼 밥으로 채웠다. 공깃밥 하나를 추가하자 "그렇게 다 먹으면 어떡해요?"라며 한마디 툭 던지신다. 그리고 바로 "다음번부터는 2달에 한 번씩은 와유, 나도 먹고살아야죠~"라며 7년 만에 왔다는 초빼이를 에둘러 타박하신다. 타박을 받아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즐겁다.
오랜만에 과식을 했다. 부풀어 오른 초빼이의 배만큼 만족감도 충만했다. 진정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서산에 오고 싶다는 아쉬움을 품고 진국집을 나왔다. '두 달 뒤면 김장김치와 게국지 맛이 좀 올랐으려나?'
* 참고 1. 어제 내린 첫눈이 폭설이 되었습니다. 수북이 쌓인 눈을 보며 눈 길을 걷고 싶어 오늘은 걸어서 작업실로 출근했습니다. 눈을 밟는 그 감촉보다, 눈이 녹아 고인 물이 옷에 튈까 염려하는 초빼이의 모습에 '나도 이젠 늙었구나'하며 한탄했습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메뉴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백반(게국지) + 어리굴젓 또는 추가메뉴 + 소주
2. 2인 방문 시 : 세트 메뉴(수육과 보리굴비가 좋아 보입니다) + 어리굴젓 + 소주
3. 3인 이상 방문 시 : 백반 + 우럭젓국 또는 우럭포찜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공간 없음. 인근 공영 또는 민영 주차장 이용
2. 월~일 08:30~21:00
3. 참고
- 어리굴젓은 많은 손님들이 주문하는 메뉴.
- 우럭젓국과 우럭포찜은 서해안 지방의 향토 음식. 담백하지만 인상적인 맛이 술안주로 좋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원조부석냉면, 동문칼국수, 중화원, 어머니손칼국수, 옛날빵집, 선창식당, 쪽갈비석쇠구이,
웅도낙지, 황우숯불갈비, 길손호프, 부자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