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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Dec 12. 2023

말 한마디에 천냥이면 너무 싸다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나와 동생에게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다. 바로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이다. 그만큼 말조심을 하고 말을 예쁘게 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동생도, 그리고 우리를 가르치시던 어머니도, 모두 말을 예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여전히 말을 예쁘게 하는 건 잘 못하지만,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말 한마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늘 명심, 또 명심을 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어느덧 나이가 꽤(?) 들고 보니 어릴 때는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체감하지는 못하고 그저 명심만 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내 삶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꽤나 큰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에는 정책적으로 중학생들을 진학시킬 때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 중 무작위로 하나를 뽑아 진학하게 했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명문고에 가기 위해서는 명문고 근처에 살아야 확률이 올라갔기 때문에, 우리 집도 명문고 근처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중학교에서 그쪽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우리 반에서는 나를 포함해 고작 두 명뿐이었다. 이윽고 졸업이 가까워올 무렵, 정확히는 어떤 종류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고등학교에 제출할 서류를 뽑으러 교무실에 잠시 들렀다.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려 서류를 뽑아 받아 들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나를 쳐다보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말씀하셨다.

  "너라면 거기 가서도 잘할 거야."

  진짜 별거 아닌 그 사소한 말 한마디에 친구들도 거의 없는 낯선 학교로 가야 하는 나의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뭐 결국 가서 보니 괴물같이 공부를 잘하는 애들 천지라 금방 기가 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저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 한편에 살며시 남아 그래도 나에게 기대를 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는 사실을 때때로 상기시켜 주며 나를 북돋아 준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가까워올 무렵, 나는 문과와 이과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놓고 꽤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항상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어서 무조건 이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성적을 보니 문과 쪽 성적이 훨씬 잘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는 문과 체질인가' 하며 고민에 휩싸였다.

  그래서 상담을 받고자 학원 수학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뭔데?"

  "이제 문, 이과 중에 선택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넌, 이과잖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문과 쪽 과목들 성적이 훨씬 잘 나오는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셨다.

  "채식주의자도 가끔은 고기가 먹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야. 넌 천성 이과야."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이과로 결정했고, 그렇게 공대에 진학하고, 결국에는 IT 회사로 취업까지 하게 되었다. 만약 그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길을 걷고 있었을까.



  2016년도 어느 날, 친구들하고 이태원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술은 다른 곳에서 이미 진탕 마시고 난 상태였고, 다 같이 택시를 타고 2차로 이태원을 간 것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또다시 자리를 옮기자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다른 가게로 향했다. 주말 밤이어서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자리를 옮기던 중에 나와 친구들은 둘로 나뉘었다. 일단은 다 같이 모여야 한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워낙 사람도 많고 시끄러워서인지 친구가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었고, 마침내 친구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외쳤다.

  "야, 어디야! 이쪽으로 와!"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 제호?"

  "그럼 누구겠냐!"

  "… 잘못 건 거 아냐?"

  친구의 그 말에 다급히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어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뿔싸, 친구가 아니라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하는 부장님 이름이 떠있었다. 친구도 부장님도 둘 다 이름이 ㅊ으로 시작하고 가운데 이름에 ㅅ이 들어가는 지라, 아무 생각 없이 ㅊㅅ으로 검색하고선 확인도 안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다급하게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부장님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부장님은 문자를 읽으셨는지 아닌지 답은 없으셨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그때 시간은 무려 새벽 1시 반이었으니까.

  그리고 월요일 아침, 죄인의 심정으로 출근해서 조심스레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한 10여 분 뒤, 부장님이 출근하셨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나에게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제호! 나는 제호가 그런 열정을 숨기고 있는 줄 몰랐네! 엄청 에너지 넘치던데?"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그대로 자리 앉아 업무를 시작하셨다. 하루종일 나는 전전긍긍하며 부장님의 눈치를 보았는데, 결국 부장님은 저 말 한마디 이후로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퇴근을 했고, 짜증날수도 있는 그 상황을 저렇게 좋은 말로 표현해 준 그분이 매우 고마웠다. 그리고 덕분에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화를 걸기 전에 두 번, 세 번 상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위의 저분들은 저 내용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실 듯싶다. 그분들에게는 별거 아닌 사소한 말 한마디일 테니. 하지만 그런 사소한 한마디가 나에게는 크게 와닿아 지금까지도 그 말들을 되새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 인생의 큰 방향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리고 반대로, 가끔은 내 사소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에도 퇴근길에 후배의 차를 얻어 타고 오면서 별거 아닌 수다를 떨었었는데, 그때 나는 후배에게 '회사를 왜 다니는지 잘 생각해 봐. 주객이 전도되면 안 돼.'라고 가볍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참뒤에 후배가 그날 나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선, 집에 가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그 얘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가 그렇게 영향을 줄 거 알았더라면, 좀 더 말을 신중하게 아껴서 할걸'이라며 후회되기도 되고, 내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영향을 받았듯이,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누군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예전보다 더 가까이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이면 싼 편일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기도 하니까.





덧)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수업의 과제 중 글짓기 과제가 있었다. 소설 '큰바위얼굴'에서 주인공인 '어니스트'를 제외한 다른 인물을 골라, 그 인물을 주인공으로 글을 지어오라는 과제였다. 그저 귀찮을 뿐인 숙제였지만, 때마침 심심했던 터라, 등장인물 중 하나인 '개더골드'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써보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골드러시에 올라타서 금을 캐러 갔다가 우연히 떼돈을 벌고, 그 돈을 철광 등 각종 광맥에 투자해서 크게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썼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대공황으로 그 돈들을 다 잃고 몰락한 상태로 쓸쓸히 혼자 눈을 감는 것까지. 

  그리고 얼마 뒤 국어 선생님께서는 과제로 제출한 글들 중 내 글을 골라서 반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제호가 이런 재주가 있었네?"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 덕분에 그날부터 글을 쓰는 게 좋아졌고, 그덕이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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