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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Dec 05. 2023

생략의 시대

  얼마 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리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영화에 알 수 없는 비유나 맥거핀이 많은 것에 대해, 감독이 자신의 얘기를 영화로 담는 바람에, 아는 사람과 얘기할 때처럼 무의식 중에 서로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은 생략하고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우리는 대화 도중에 때때로 많은 것들을 생략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 방식은 늘 불필요한 수고나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인프라와 애플리케이션 구축/관리를 담당한다. 그러다 보니 통상 프로젝트에는 나와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이 없거나, 많아 봐야 한 명 정도 더 추가가 된다. 그러다 보니 몇십, 몇백이나 되는 프로젝트 인력들이 시스템 관련해서는 전부 나에게 문의를 한다. 그럴 때 연락을 오는 유형들은 천차만별인데 그때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일 처리 속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우선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용건이 명확하며 요구하는 내용도 명확하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김제호 프로님. ㅇㅇ개발자 ㅇㅇㅇ입니다. ㅁㅁㅁㅁ프로그램 수정 중에 ㅇㅇㅇ권한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나왔는데, 확인해 보니 ㅇㅇㅇ권한 중에서 ㅁㅁ항목이 빠져있어서 이 부분 추가 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권한을 추가해 주실 ID는 AAA서버의 100 클라이언트의 XYZ입니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쉽게 파악하고 쉽게 조치할 수 있도록 요구사항을 얘기한다. 그러면 나도 별다른 이유가 없는 이상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반대로 일 못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굉장히 길어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권한이 없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권한이요?"

  "프로그램 개발 권한이요"

  "권한은 다 있으실 텐데요?"

  "프로그램 수정이 안 돼서요"

  "안 되는 부분의 로그를 보내주시거나 스크린샷을 찍어서 보내주시겠어요?"

  "(스크린샷을 보내고서) 이렇게 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잘 되시는 스크린샷 말고, 문제가 된 부분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시겠어요?"

  "(다시 찍어서 보냄) 보냈습니다."

  "스크린샷을 찍으실 때, 하단에 뜨는 메시지까지 보이도록 스크린샷을 찍어서 보내주시겠어요?"

  "(다시 찍어서 보냄) 보냈습니다."

  "저 메시지는 권한 때문에 발생한 오류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발생한 오류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프로그램 내부 로직 오류일 거라… (당신이 만든 프로그램인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럼 디버깅 권한 넣어주세요"

  "이미 다 들어가 있습니다."

  "패스워드 초기화도요."

  "SID랑 클라이언트, 계정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XXXX요."

  "SID랑 클라이언트도요."

  "AAA, 100입니다."

  "네, 초기화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정말이지 화를 누르고 친절하게 말하는데 온 정신을 다 집중해야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저 사람의 이름이 외워지고, 저 사람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내용과 상관없이 일단 짜증이 치솟곤 한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의 특징이 내가 본인 하고만 대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나와했던 대화를 다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명과 저런 식의 대화를 하기 때문에 내용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그들이 너무 당연하게 주어를 생략하고 말할 때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예를 들어 저 위에 사람에게 다시 일주일 뒤에 연락 왔다고 해보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로직 수정했는데도 권한 에러가 발생해서요."

  "무슨 말씀이시죠?"

  "저번에 그 프로그램 수정했는데도 에러가 납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저번 프로그램이라고만 하시면 알 수가 없어서요."

  "ZZZ프로그램이요."

  "제가 직접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에러화면을 봐야 조치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실행하면 되죠?"

  "프로그램 명을 넣고 실행하시면 됩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겠냐) 그냥 실행하면 안 되고 파라미터를 넣어야 할 텐데 파라미터 값도 주시겠어요?"

  "값은 TT입니다."

  "(확인 후) 이거는 권한 에러가 아니에요. 밑에 메시지가 뜨는 걸 잘 읽어보시면, '해당 클라이언트에서는 수정할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라고 나오잖아요?"

  "그럼 어떡하죠?"

  "기존에 공지드린 바와 같이 해당 오브젝트 수정은 다른 클라이언트에서 하시면 됩니다. (두 달 전에 세 번이나 공지했다 짜샤)

  "그럼 ID 만들어주세요"

  "이미 있으세요."

  "그럼 패스워드 초기화해 주세요."

  "초기화했습니다."

  (대화를 옮겨 적는 것뿐인데 쓰면서도 화가 난다.)


부들부들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자기 혼자만 기억하고 혼자만 아는 내용을 상대도 안다고 생각하고 짧게 짧게 얘기를 하니 언제나 대화가 길어진다. 내 편견일 수 있지만 저런 사람은 보통 대화만 그런 게 아니라 일에 대한 지식도 많이 모자라다.

  이처럼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주어를 생략하면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저런 종류의 사람들이 그런 식의 소통을 하는 데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언어능력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고, 남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던가,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저런 사람들은 결국 나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저런 식으로 소통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다지 썩 좋지는 않다.

  내가 속한 업계는 생각보다 평판에 의해 많이 좌우되곤 한다. 이직할 때도 물론이거니와 프로젝트에서 일할 외주 인력을 뽑을 때도 최소 한 곳 이상에서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을 물어보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처럼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은 당연히 평판이 좋지가 않아서 잘 뽑아주지 않는다. 더욱이 치명적인 건, 저 사람이 비록 일을 잘한다 한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일이 잘 진행되지 않고 답답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 사람을 평할 때 '의사소통이 힘든 사람'이라 평하지 않고 '일하는 게 답답해서 별로…''라고 뭉뚱그려 일축해 버린다는 것이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 여부를 따질 때, 얼마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가도 포함되는 셈이다. 결국 저런 평을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레 기피하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점점 도태되어 가다 어느 순간 시장에서 사라지곤 한다.


  그런데 요새 이런 식의 소통을
전혀 의외의 영역에서 마주하고 있다.

바로 게임이다.

제 계정은 아닙니다


  나는 꽤나 게임을 많이 즐기는 편이다. 예전에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이나 휴대폰 게임들을 주로 해왔고, 요새는 PC게임을 많이 한다. 한때는 매주 금요일에 게임을 하나씩 사서 주말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게임에만 시간을 투자해 클리어하고, 월요일에 CD를 중고로 팔고는 했다. 빈도와 플랫폼이 바뀌었을지언징, 지금도 여전히 게임은 내 여가시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점점 꽤 괜찮은 게임을 찾는 것이 힘들어졌다. PC든 휴대폰이든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응당 튜토리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튜토리얼이 없거나, 있더라도 꽤나 간소화되거나, 아니면 무슨 책처럼 텍스트로 줄줄 읊어주는 게임들이 대부분이다.

  처음 징조는 휴대폰 게임에서 나타났었다. 요즘 유행하는 RPG 게임들은 게임에 접속해서 캐릭터를 만들고 나면 간단하게 프롤로그가 나오고는 바로 본 게임에 들어간다. 근데 그 순간부터 나를 반겨주는 건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용도를 알기 어려운 수많은 버튼들과 끝없는 이벤트 공지, 그리고 수십여 가지의 캐쉬템 리스트들이다. 그래서인지 대략 3년쯤 전부터는 새로운 RPG 게임을 시작하는데 거부감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 해볼라 하면 일단 설명도 없이 복잡한 화면만 보이고 자꾸 뭘 사라고만하니까. 처음에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것들을 보면 복잡하다고만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PC게임으로 옮겨간 다음부터 사라졌다.


시작부터 뭐가 너무 많아…


  PC게임으로 넘어가서도 꽤 많은 게임들을 했다. 순위권에 있는 게임들 대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내 취향에 맞는 마이너한 게임들도 찾아가며 열심히 게임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게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사람들이 명작이라 칭하는 게임들도 다수 있었다.

  사람들이 워낙 명작이라고 칭송하는 게임들이기에 나도 시도를 해보긴 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꽤 심한 난관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게임이 어려워서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어려운 게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불친절함이 문제였다.

  저런 종류의 게임들의 제작사는 장르와 상관없이 무언가 전작의 게임들을 통해 명성이 높은 제작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기네 게임을 소비하는 사람들만을 타깃으로 계속해서 게임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다 보니 나처럼 새롭게 유입되는 유저들을 위한 튜토리얼이 굉장히 부실했다. 시리즈 물의 2편이나 3편도 아니고 같은 제작사에서 만들었을 뿐인 전혀 새로운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해본 모 RPG 게임이 대표적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세계관설명을 전혀 알 수 없는 용어로 혼자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게임이 시작되고 그냥 광활한 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는 조작법을 설명해 주는데, 눌러야 하는 버튼이 한두 개가 아니고 대체 그게 무슨 기술이며 어떨 때 써야 하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러더니 밖으로 나를 내보내놓고는 그냥 놔두었다. 아무리 오픈 월드라 하더라도 초반에는 어느 정도의 방향성이나 큰 틀은 잡아주어야 함에도 그냥 방치해 버렸다. 억지로 패드를 붙잡고 게임을 진행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이 게임의 세계관에 몰입하기는커녕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조차 찾지 못한 채 게임을 끄고 환불을 받았다.

  만약 내가 예전부터 저 게임사의 게임을 즐겨 한 유저라고 하면 경험에 기반해 그 게임에 대해 직관적으로 대략 파악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조작해야 하고 대충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하고 등등. 하지만 저 게임사는 오로지 자기네 게임을 하던 사람들만 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너 이거 이미 알지?' 하는 식으로 튜토리얼을 대충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나처럼 새로이 유입되는 유저에게는 굉장히 불친절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동안 만든 게임들 중 신규유저에게 제일 친절한 게임이란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겨


  만약 저 게임의 팬들이라면 내가 나이 먹어서 혹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더 복잡하고 어려운 시스템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된 튜토리얼과 짜임새 있는 레벨링 시스템을 통해 접근하기 쉽게 만든 게임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갓오브워'라는 게임을 들 수 있다. 이 게임도 결코 시스템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게임의 시작 부분에서 유저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방향키와 점프, 공격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추가적인 기술이나 능력들은 스토리를 진행하며 천천히 추가된다. 그러다 보니 유저는 처음에 단순한 조작과 시스템으로 시작해서 빠르게 습득하고 충분히 적응한 다음 그 위에 새로운 조작법과 기술들을 얹을 수 있다. 심지어는 그 조작법들도 엄청 직관적이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무기를 몇 개씩 바꿔가며 싸우고 각종 스킬들을 구사해야 함에도,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충분한 시간과 과정을 통해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예전에 해외 모 유튜버가 아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게임이라는 걸 전혀 해보지 않은 아내에게 모든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말하는 게임 9개를 골라서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고 해 보도록 한 것이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슈퍼마리오나 갓오브워 같은 게임들은 게임을 전혀 해보지 않은 아내조차 쉽게 조작법을 익히고 재밌게 즐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게임들은 '이미 꽤 많은 게임을 해본 게이머'를 상대로 튜토리얼을 만들어놓았거나, 아예 튜토리얼이 없었기에 그런 게임들을 할 때는 아예 진행을 하지 못하거나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진행해야 했다.

   

도끼 조작이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찰졌다.


  이처럼 소통의 방식은 생각보다 많이 중요하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대사람의 소통에서 자꾸 주어를 생략해서 여러 번 질문이 오고 가야 한다던가, 게임 튜토리얼의 과정을 너무 생략해서 인터넷에서 별도로 찾고 스스로 계속 반복 연습을 해 야한 던가 하는 이런 문제점들은 모두 저 '생략'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생략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혹은 유저가 내가 아는 것만큼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 테니까. 심지어 어떨 때는 왜 그것도 모르냐며 상대나 유저를 윽박지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곤 한다. 그들도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 있었을 것임에도 올챙이 적을 생각 하지 못하고 그러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요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게임에서도 많은 피로를 느낀다. 너무 많은 배려들이 사라졌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으며, 그걸 내가 일일이 다 찾아서 확인하고 되물어보고 연습해야 하니까.



  요즘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 혹은 당연히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많이 무너지고 있다. 기술이나 문화의 발전 혹은 시대의 변화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겠지만,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는 것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특히나 소통의 방식에서 그 변화가 두드러진다. 오프라인에서든 온라인에서든, 그 매개체가 언어든, 문자든, 영화든, 드라마든, 게임이든 상관없이 모든 부분의 소통에서. 아마 요즘 사람들 간의 연결이 자꾸 느슨해지는 것도 저런 소통 방식의 변화가 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극단적인 사상과 혐오만이 남아 서로를 공격하는, 지금의 사회가 된 게 아닐까도 싶다.



상대를 배려하며 소통하는
그런 상식적인 세상이 되길.



 

굳이 힘들게 주고받을 필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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