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케이크를 참 좋아한다. 정작 빵은 입에도 안 대면서 케이크는 무슨 영양제처럼 주기적으로 먹곤 한다. 아무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놀다가 점심을 먹고는 밖에 나가 카페로 향하곤 한다. 그리고는 카페에서 조각케이크 하나와 콜드브루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재밌는 영화나 유튜브를 보며 먹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때 먹는 조각케이크는 거의 정해져 있다.
고등학생일 무렵, 나는 세상물정을 아예 모르는 아이였다. 당연히 학생이니까 세상물정을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즘으로 치면 친구들이 탕후루 얘기를 해도 "그게 뭔데"라고 하는 그런 아이였다.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니는 학교가 남고인 데다가 나름 명문인 곳이라, 주변 친구들도 그런 유행에는 큰 관심 없이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었던 것도 한몫한 듯싶다.
그랬던 아이가 나이를 먹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가 생겼다. 여자친구는 나와는 다르게 나름 유행을 잘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유행만 쫓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때로 여자친구는, 나를 데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문화나 음식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는 나에게 내가 처음 들어보는 음식을 얘기했다. 나는 처음 들어본 음식이라 그게 뭔지를 되물어봤다. 그러자 여자친구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금요일 저녁에 꼭 같이 먹으러 가자는 얘기를 했다.
금요일 저녁에 여자친구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 당시 나도 여자친구도 서울 강서구 쪽에 살고 있었는데, 여자친구는 김포공항 국내선 쪽 식당가 근처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뭘 하는지, 뭘 먹을지도 모른 채 그저 여자친구를 따라갔다. 철이 없던 나는(지금도 없을지도) 그저 최근에 본 재밌었던 만화책 얘기를 하며 졸졸 따라갔다. 그렇게 식당가에 도착해서 제일 위층에 올라가, 다른 가게들을 한참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디저트 카페가 하나 있었다.
카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절대로 장사가 잘 될 위치가 아니었다. 식당가 제일 위, 제일 안쪽이라 접근성도 좋지 않았고, 근처 공간들은 전부 비어있고 그 카페만 있었던지라, 약간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름 노란색을 테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긴 했지만, 카페 안에 앉아서 카페를 둘러싼 통유리를 통해 밖을 쳐다보면 어둡고 고요할 뿐이었다.
여자친구가 다 알아서 주문하겠다고 했기에, 나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친구는 커피와 함께 처음 보는 종류의 케이크를 들고 왔다.
"이게 뭐야?"
"이건 티라미수라고 하는 거야."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쨌든 맛을 보려고 포크를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자친구는 포크를 들지 않았다.
"넌, 안 먹어??"
"응. 너 먹으라고 사 온 거야."
그 소리에 나는 무언가 수상함을 느꼈다.
"이거 혹시 맛이 이상한 거야?"
"아냐, 되게 맛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는데, 나는 오늘 안 먹을라고."
"맛있는데 왜 안 먹어?"
그러자 여자친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먹어보면 알아."
그래서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티라미수를 떴다. 냄새를 맡아보니 위에 뿌려진 코코아 파우더에서 미세하게 코코아 냄새가 났고 약간의 커피 냄새가 났다. 빵 위에 덮인 크림은 어떤 크림인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적어도 생크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은 순간이었다.
"컥! 컥!!!"
너무 고운 코코아 파우더 입자들이 입천장과 기관지를 덮었고, 덕분에 나는 연신 기침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는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한 1분여를 계속 기침을 하다가 겨우 기침을 멈추고 말했다.
"너, 이러려고 이거 사주는 거야?"
"맞아. 그래서 나는 안 먹은 거고. 하지만 맛있지?"
"어, 맛은 있는데."
그러자 여자친구는 자신의 포크로 케이크 위를 쑥 훑으며 코코아 파우더를 걷어냈다.
"이제 기침은 안 할 거야. 얼른 먹어."
또 기침이 나올까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우더를 걷어냈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었다. 그제야 좀 더 명확하게 케이크의 맛이 느껴졌고, 은은한 커피 향과 코코아향, 그리고 마스카포네 치즈의 단 맛이 어우러져 단맛과 쓴맛의 조화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빵도 커피에 촉촉하게 젖어있어서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는 티라미수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1~2주에 한 번은 카페에 들러 티라미수를 사곤 한다.
치즈케이크나 티라미수나 맛있는 건 매한가지고 티라미수라는 케이크만이 다른 케이크들에 비해 우월한 맛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별거 아닐 수 있는 저 날의 저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인해 그 케이크는 내 안에서 나름 특별한 모양과 맛을 갖춘, 음식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 그렇기에 남들에게 별거 아닌 케이크일지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최고의 디저트로 남아있다.
내 삶을 뒤져보면 티라미수처럼 나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무언가 들이 있다. 훈련병 시절 5주를 견디고 처음으로 PX에 가서 사 먹은 커피우유(지금도 마시면서 쓰고 있다)라던가, 친구가 빌려준 게임 가이드북 때문에 홀딱 빠지게 됐던 포켓몬스터라던가, 회사선배가 사줘서 어쩔 수 없이 마셨음에도 맛있다고 처음으로 느껴보았던 싸구려와인이라던가, 난생처음 산타에게 받았던 선물인 레고라던가, 대학생이던 사촌형이 명절에 보여준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이라던가,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처음 노래방에 갔을 때 그 친구가 불렀던 노래라던가, 밤새 게임하면서 계속 틀어놓았더니 그게 그 게임의 주제가냐고 엄마가 물어봤던 노래라던가, 너무나도 갖고 싶었지만 딱 이만 원이 부족해서 아쉽게 내려놓아야 했던 후드티라던가, 방학 때 토익공부를 하던 카페에서 틀어준 노래를 듣고 홀딱 반해서 모조리 사버렸던 어떤 가수의 앨범들이라던가. 각각의 물건이나 음식, 문화들 하나하나는 사실 별거는 아니다. 하지만 티라미수처럼, 저런 것들도 저런 사소한 계기들로 인해 나에게는 특별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 걸 보면 무언가를 소중하게, 특별하게 여기는 계기는 늘 사소한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하게 되는 것도 늘 사소한 것이 계기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 웹툰 '낢이 사는 이야기'에서 작가인 낢이 남편인 이 과장을 보곤, 남편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목젖에 사랑의 닻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임에도 사소한 계기로 인해 남편인 이 과장에게는 아내의 목젖이 특별하게 와닿은 것이고, 그게 결국에는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걸 보면, 어쩌면 우리가 매우 크고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 하는 별거 아닌 생각들이나 행동들이 어떠한 큰 일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저 티라미수 일화를 추억하는 것처럼, 먼 훗날에 지금의 시간들을 웃으며 추억하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바로 그 사소한 계기들 덕분에
어떤 것들은 추억이 되어 내 안에 특별하게 머무르고,
결국에는 그것들이 모여 내가 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