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특별하지 않은 나의 소소한 생활 속 발견이었다. 이 감정을 느낀 것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공백을 만들고 돌아왔을 때이다. 너무 긴 시간 공백을 만들었던 까닭이었을까, 아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복잡한 감정과 사념들을 비워서였을까 정확한 내력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긴 공백을 끝내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는 감정, 생각, 마음, 행동이 잔잔한 호숫가 드리운 낚싯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잔잔한 호숫가에 드리운 낚싯대는 고기가 낚이지 않는다. 호숫가엔 작은 피라미조차 살지 않기에, 그 어떤 파동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낚싯대는 고기를 낚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리워져 있기에 그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감정은 고요함이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한 자리에 우직하게 앉아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꽤 다양한 영향들이 덮쳐온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들의 감정과 생각 따위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초파리만큼이나 보잘것 없이 평가되곤 한다. 타인의 듣기 싫은 언행들이나 행동들,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들이 바로 그 주체가 된다. 잠시 골똘히 생각해보면 그동안의 복잡한 감정과 사념들은 모두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들은 나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다. 내가 개척한 길과 만들어 놓은 이정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만의 의지와 신념을 가져 타인이 건들릴 수 없는 영역에 몸을 적셔 놓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이 힘들다. 의지와 신념. 이것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야겠다.
어쩌면 20년이 넘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이들에게서 도망치는 연습과 꾀만을 노력했지 않나 싶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기 자신이 우뚝 서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다. 어느 시기를 가리키든 타인과 자신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눈동자는 무한한 동력을 가지고 있는 메트로놈처럼 움직였고, 사고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서 이행되고 있었다. 이렇나 내력을 가졌기에 머리는 아팠고, 눈은 피로했다.
이번 공백이 특별했던 점은 이들에 대해서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이들에 대해 감정 이입과 역지사지, 개선을 위한 객관적인 가면만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백에서는 상황과 삶 그 자체만을 바라보았다. 그 어떠한 의지, 사고, 사념, 생각, 마음, 감정, 이상, 이념이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전히 간직한 바라봄을 가졌다.
그렇게 해서 나온 문장은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입니다.'이다. 나는 결국 나로서 존재한다. 타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나의 생각과 감정은 온전히 나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통제되는 감정과 생각들은 결코 나의 감정과 생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그저 문자로써 존재하는 것들이다. 결국 나는 나이기에 타인은 날 바꿀 수 없다. 바뀌고자 마음을 먹고 변화를 꾀하는 것은 오직 나이다. 타인이 들어올 틈은 없다. 그렇다면 이는 반대로 타인에게 대입하여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나는 타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의 이상을 그들에게 주입시킬 수 없다. 그들은 자체의 의지의 격률을 가진 존재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의 노력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모든 상황에 대해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타인이 무슨 말을 한들 그 의미를 채택하거나 버리는 것은 내가 택할 문제다. 고민하기 싫다면 고민하지 않으면 된다. 필수적으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는 곧 나 스스로도 타인에게 많은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들도 그들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나의 뜻을 관철하거나 최소한의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들의 선택이므로 나는 그것에 대해 존중을 표해야 한다. 꽤나 편리한 삶의 태도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얼마 만에 느끼는 공기인지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