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없는 자에게 더 가혹하다.

몸으로 경제를 배우게 된 청년의 이야기 - Chapter 6

by UC

새로 찾게 된 야구모자라는 아이템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양식으로 수량과 가격 모든 종류의 사진까지 처음보다는 완성도가 높은 제안서를 메일로 보냈고 역시나 좋은 아이템은 피드백이 빠를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장 가까운 시일로 미팅 약속을 잡고 샘플을 챙겨 가져 갔습니다. 샘플의 퀄리티를 보고 역시나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지난번 경험으로 한 번 더 딜이 들어올 거라 예상해서 판매가 4,500원을 제시하고 딜을 통해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던 3,900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판매가로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담당 MD도 상품의 퀄리티와 판매가를 보고 잔뜩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직책이 MD가 맞는지 가물가물합니다.)


가장 빠른 일정으로 판매일을 정하고 잠자는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여러 번 상황을 체크하며 준비를 했습니다. 3일간의 판매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상품을 판매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혹시나 운 좋게 찾아온 기회를 준비가 부족해서 그냥 버리는 일이 없도록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드디어 판매가 시작되는 당일 오픈이 되고 상품이 판매 중으로 변경되었을 때 쓰나미처럼 밀려온 피로감으로 둘 다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4~5시간을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1800건에 달하는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는지 조금은 미지근한 기쁨이었지만 그래도 첫날이고 아직 많이 남은 오늘에 기분 좋은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도매집으로 재고를 확보하러 출발했고 나는 주문을 취합해 매입을 해올 상품의 수량을 정리하고 최근 배운 택배에 붙일 주소 라벨을 프린트했습니다.


3일간 총판매량은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약 7천 개의 상품이 판매가 됐고 사실 정말 너무 기뻤지만 반품기간과 정산을 받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차분하게 상품 발송에 큰 문제없도록 할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상품 발송이 모두 완료되기 무섭게 담당 MD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다고 플랫폼 측에서도 프로모션을 준비해볼 테니 2주 후에 또 진행이 가능한지 물어왔습니다. 2주 후에 총 4일간의 판매 일정이 잡혔고 이때 비로소 시장에서 먹히는 상품을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능하다면 업계 1, 2위를 다투는 다른 플랫폼에서도 판매를 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소셜커머스라서 그런지 플랫폼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연락도 제안서도 미팅도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판매 일정을 받아내는데 까지 도달했습니다. 2주 후에 있을 판매가 끝나고 그다음 주로 일정을 잡았고 이렇게 한 달에 3번의 총 10일의 판매를 했습니다. 온라인 판매는 택배비에서 백마진이라는 이익을 보게 되는데 택배를 많이 보내는 업체일수록 배송비가 저렴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택배 실적이 없어서 2천 원으로 계약을 했고 2천5백 원의 택배비를 소비자에게 받아 500원의 마진을 남기게 됐습니다. 상품 판매 마진은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개당 3,000원을 정산받았고 한 달 동안 대략 21,000개를 판매해서 2,10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봤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가장 많은 이익이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불과 두세 번의 판매를 진행하는 동안에 유명한 소셜커머스 중 2개에 판매 일정을 자연스럽게 조율할 정도로 빠르게 익숙해졌고 남아있는 소셜커머스에도 판매를 시작하면서 당시 독보적이었던 3대 소셜커머스에서 모두 판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도매집에서도 장사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많은 양을 가져가는 거래처는 없었다고 단가를 200원 낮춰 주었고 택배 발송도 꾸준하게 실적이 오르자 발송 비용을 1800원까지 낮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인 판매 일정으로 소비자의 반응은 생각보다 일찍 시큰둥해져 가고 있었고 판매수량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상품의 신선함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쯤 3사에서 모두 한 달 정도 휴식기간을 제안했고 공교롭게도 3사가 모두 하루 간격으로 휴식을 제안한 걸 제외한다면 우리도 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별다른 의구심 없이 휴식기간을 수락했습니다. 찝찝한 기분에도 별일 없을 거라는 위안을 했지만 휴식을 제안받은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소셜커머스에 야구모자가 판매되고 있는 걸 봤습니다. 판매 가격이 우리보다 더 저렴하다는 건 둘째치고 아무리 봐도 우리가 판매하는 상품과 같은 라벨이었고 그 상표는 우리가 거래하는 곳의 상호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상품이었습니다. 일단 거래처로 달려갔습니다.


도매집에는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사장님은 보이지 않았고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있었습니다. 본인을 여기 사장님의 아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서로 인사가 끝나고 오는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했습니다. 소셜커머스에 직접 진행하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다른 곳의 상품을 섞어서 구성을 짜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저희를 제쳐두고 직접 진행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사실 을의 입장이었기에 무슨 대답이 오던 화를 낼 수도 옳고 그름을 따질 수 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저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이끌고 싶은 생각에 모든 기분을 배제하고 최대한 머리를 회전시켜 대화를 이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는지 이성을 잃은 목소리로 오히려 저에게 화만 내고 있었고 시작조차 되지 않는 대화에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돈 말고는 아무런 신의도 격조도 없는 장사치들의 생태계인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시간에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부터 떠올랐습니다. 현실에 대한 경멸은 돈 앞에서는 사치입니다. 당장 월세도 내야 하고 사람은 밥도 먹어야 하고 월급도 줘야 하고 생계도 이어가야 합니다. 더러웠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야구모자를 중국에서 만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어떻게 해야 제품을 주문 생산할 수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봤습니다. 마침 중국 이유에 간다는 사람을 소개받아 수고비를 쥐어 주고 생산업자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며칠 뒤 중국에서 모자 생산을 하고 있는 업체에서 전화가 왔고 다행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전화를 줘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제품의 사진을 봤고 그 도매 집도 자기 공장에서 물건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업체는 제대로 찾았고 제품 단가도 생각했던 수준이었습니다. 문제는 제품의 주문 최소 수량이었습니다. 단가를 맞추기 위한 최소 계약수량이 종류당 만개 단위였고 소셜커머스에서 판매를 하기 위해 필요한 종류가 30종이라면 총 30만 개의 제품을 계약해야 했습니다. 종류를 절반인 15종으로 줄인다고 해도 개당 1700원이라면 2억 5천이 넘는 금액이 필요했습니다. 제품을 수급하던 도매집에는 50개가 넘는 종류가 매주 2천 개씩 들어온다고 하니 새삼 그 규모가 대단하다 느껴졌고 그런 규모를 가지고 있는 곳이 내 밥그릇을 뺏어갔다고 생각하니 야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는 시도할 수 있는 작업이 아녔습니다. 힘들게 개척해서 있는 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온 꼴이 되었습니다. 뭐 어쩌면 내가 아니더라도 결국 판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분했습니다. 어찌나 분하던지 유리 멘탈의 본성은 다시 발동되었고 또 며칠을 좀비처럼 멍하게 움직입니다. 야구모자처럼 내 상황에 맞춤인 상품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야구모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니 다른 생각이 될 리가 없었습니다. 다시 오픈마켓에 매진하려 해도 만사가 귀찮고 점점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소셜커머스에서 두세 달 벌어둔 돈이 조금 있어서 그걸 믿고 이러는가 싶기도 합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친구가 떠나간 거 생각해봐야 마음만 아프니 이제 털고 일하자고 합니다. 마침 새로운 아이템이 있으니 함께 보러 가자고 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견하면 마음을 다잡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 따라나섰습니다. 여성 트레이닝복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시장 메이커가 있었는데 엉덩이와 집업 전면에 핑크라는 레터링이 돼있는 트레이닝 복입니다. 거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트레이닝 복이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여성 제품뿐만 아니라 남성 제품도 있었는데 디자인과 퀄리티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벌써 판매를 준비하고 있는 쇼핑몰의 판매 가격을 들었는데 충분히 매력 있는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즈가 프리 한 가지였는데 딱 맞게 입어도 조금 크게 입어도 핏이 괜찮아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셜커머스에서 번 자금을 모두 투입했고 깔끔하게 개별 포장된 제품도 문제없이 인수 받았습니다.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난데없이 들이닥친 이미테이션 단속에 제품을 모두 압수당하는 정말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인데 무슨 메이커라고 합니다. 똑같은 제품을 인터넷에서 버젓이 팔고 있는데 왜 나만 단속을 하는가 싶어 물었더니 누가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들은 게 말인지 방귀인지 이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싶은데 이젠 더 이상 털릴 멘털도 없고 발악할 힘도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드라마 같은 일을 겪고 나면 드라마가 현실을 바탕으로 쓰이는 게 맞긴 한가 보다 싶습니다.


그렇게 언제 접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업 아니 장사는 반 강제적으로 정리가 되었고 정리를 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내가 이런 금액의 돈을 쓴 적이 있나 싶게 어마 무시한 금액의 채무가 찾아옵니다. 그나마 돈이 돌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현금흐름이 멈추자 하나씩 터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신용카드 하나가 연체가 되더니 그걸 시작으로 단속으로 선물 받은 벌금과 준비하지 못한 종합소득세가 내 능력이 이 정도였나 새삼 감탄의 기회를 줍니다. 개인회생이라는 나라에서 만들어준 빚쟁이 구제 프로그램을 몸소 체험하고 내 행동에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마무리를 하고 나니 30대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새삼 어른이었음을 실감합니다. 그렇게 나의 20대를 함께한 동대문은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쓸쓸히 그곳을 떠났습니다.


- 1막 동대문 편 끝 -


다음 주 1막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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