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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가장 보통의 하루

by 홍재희 Hong Jaehee

1.


나는 지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십 년째 같은 집에서 날마다 비슷한 일상을 산다. 그러나 지겹지는 않다. 일견 내 말이 모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 사고 없는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다음날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으며, 나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를 게 없는 하루가 무사태평하게 지나가서 좋고 그래서 지루한 일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거나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래서 더 좋다. 일상의 소중함과 인연의 귀중함이야말로 지루한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묘미가 아닌가.



한 때 밖으로 길 위를 떠돌았다. 부모가 애인이 있었어도 마음을 둘 집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내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였을 수도 있다. 아마도 불안과 분노가 삶의 동력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U2의 노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좌우명으로 삼고 다녔다.


https://youtu.be/P7 PpPoo81 VQ




돌이켜보면 이십 대에는 일하거나 놀거나 술을 마시거나 취하거나 섹스를 하거나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지겨운 걸 참지 못했다. 지루한 영화, 지루한 대화, 지루한 사람, 지루한 섹스, 지루한 관계가 지겨웠다. 서른을 넘어도 똑같았다. 지루함과 지겨움의 차이. 스스로를 지겨워하는 것과 타인을 지루해하는 것. 나 자신을 지겨워했던 건 자기혐오였을 것이고 타인이 지루했던 건 교만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쪽으로든 남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기기만이었을 뿐이다.



긴 시간 나는 나 자신을 찾아 헤맸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몰랐고 나를 찾기 위해서는 안이 아니라 밖에서 외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과 불화하는 내가 곧 나인줄 알았다. 착각했다. 체험이 곧 경험이 되지는 않는다.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뿌리를 내려 삶의 자양분이 되려면 차를 우려내듯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은 과정이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성공이 아니라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2.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다. 그가 사랑하는 책이나 영화를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나인줄 알았던 것일까.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과연 나인가.


인생의 중요한 과제가 뭘까. 자신의 다양한 자아를 통합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를 하나의 자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것. 페르소나에 잠식되거나 하나의 페르소나에 짓눌리거나 하나의 역할에만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 진정 사람이 되어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 그것.



과거의 나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를 알고 그 왜를 인정하고 그 왜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라고 다 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기 싫은 나도 있고, 인정하기 싫은 나도 있으며, 부끄러운 나도 있고, 미워하고 혐오스러운 나도, 감추고 숨기고 싶은 나도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이불킥을 하는 이유다.


어디서 누가 한 이야기인데 과거의 내 모습은 집에 도착한 택배와 같다고. 주문한 사실조차 까먹고 있다가 어느 날 문 앞에 떡, 하니 와 있는 택배. 누가 시켰지? 내 건가? 하는 의문과 아, 그랬지! 하는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드는 택배가 바로 자신의 과거라고. 그렇구나! 과거의 나는 타인이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나의 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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