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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n Jun 23. 2022

감정적인 '앙상블', 그 이후엔... :연극 <앙상블>

극단 산울림 연극 <앙상블> 리뷰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위에는 낡고 작은 가정집 주방이 그대로 옮겨져 있는 듯하다. 찬장에 쌓여있는 식기들과 손때 묻은 냉장고, 오래된 탁자는 연극을 위해 창작된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는 터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 자체가 작은 원형 극장이라 맨 뒷열에서도 배우들의 얼굴 표정이 잘 보이기에, 극 속의 공간이 관객의 삶과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극 진행 중에 배우가 막을 하나 치면, 무대 위 공간은 순식간에 회사나 장애인 특수시설이 되곤 한다. 공간의 사용은 회사에서 온 사람도, 시설에서 온 사람도, 겉보기엔 서로 달라보이더라도 실은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 반대 방향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자연스레 한 데 섞여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벽을 치고 서로 구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작품은 가장 평범한 배경 속에 존재하는, 장애가 있는 성인 아들 미켈레, 자신에 대한 가족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며 집을 나간 딸 산드라, 미켈레에게 헌신하며 살아가는 어머니 이자벨라로 이루어진 평범하지만은 않은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평온하던 이자벨라와 미켈레의 일상은, 10년 전 집을 나갔던 딸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에 어색함과 긴장으로 가득찬다. 산드라는 엄마와 오빠가 자신이 집을 나가 있던 사이 이사한 집을 처음 마주한다. 산드라와 마찬가지로 이사벨라와 미켈레의 집을 처음 들여다보는 관객들에게도 산드라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레 '겉보기엔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새삼 자세히 들여다 볼 기류가 형성된다. 

연극 <앙상블> 포스터. 2019년도에 산울림 소극장에서 초연되었던 이후 3년만에 재공연되었다.

      집을 나가, 집 밖의 시선에서 가족들을 바라보던 산드라는 집 안에 들어와 이사벨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서야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앎으로 인해 찾아온 건 서로를 향한 '이해와 사랑' 이다. 서로를 다 안다고 믿고 상처주던 이 가족들에게도 서로가 모르는 비밀이 새로 드러났듯, 안다고 치부해 옆으로 치워놓은 모든 것들은 조금만 가까이 바라보면 사실 가장 낯선 형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곪아가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중요할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이 제시하는 실마리, '사랑'은 관객의 마음을 울리며 정서적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감성에 젖어있다 보면, 가끔은 생각이 마비되기도 한다. 따뜻한 음악 속 서로를 꼭 끌어안은 모습으로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제시되는 가족애는, 순간적인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이사벨라, 미켈레, 그리고 산드라는 미켈레의 생일날이 지나고도 꾸준히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앙상블'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 좁은 방을 들여다보면,

    지능이 어린 아이 수준에 멈춰있는 30대 남성 미켈레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머니 이자벨라,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 온통 미켈레에게 쏠려 있다고 생각해 집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여동생 산드라. 두 사람은 미켈레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논쟁한다. 산드라는 오빠 미켈레와, 그에게 맞추어 우울증 약까지 먹어가면서 희생하는 이자벨라가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반면 이자벨라는 자신의 친오빠가 창피해 집을 나가 약혼자에게도 오빠를 밝히지 않는 산드라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켈레, 그리고 서로의 정상성에 대해 논쟁하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가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있지는 못하다. 이자벨라는 미켈레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미켈레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말하는 것은 뭐든 옳다고 말하곤 한다. 계란이 깨지지 않음에도 미켈레가 깨졌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더라도, 미켈레가 기다린다면 아직 살아 계신 것이다. 산드라는 이러한 이자벨라의 태도에서 그가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산드라 역시 약혼자에게 자신의 오빠가 있다는 것을 숨기고, 이사벨라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오빠를 시설로 보낸다. 두 사람은 미켈레를 사이에 두고 ‘정상인 것’과 ‘정상이 아닌 것’에 대해 논쟁을 하지만, 실상 그 본질은 자신 안에서 느끼는 자신의 비정상성을 가리고, 상대의 비정상성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모순된 인물들이 나누는 서로에 대한 논쟁 속에,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미켈레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들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두 인물의 대사들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장들에 대한 대변일 수도 있다. 미켈레의 곁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그를 돌보는 이자벨라는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가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막고, 그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아 그가 사회와 연결될 방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막는다. 낱말 퍼즐에 드러난 ‘장애인’에 대한 정의, ‘무력함으로 타인에게 동정심을 자아내는 존재’라는 표현을 보고 착잡해하는 것도 이자벨라이지만, 미켈레를 무력하게 가두어놓는 것도 이자벨라이다. 집을 떠나버리고 그 이후 미켈레를 제대로 본 적이 없으면서도, 가장 객관적인 행세를 하며 현실을 보라고 말하는 산드라. 그는 미켈레를 대해 제대로 이해할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그를 시설에 보내 사회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그리고 회사에 취직하고자 면접을 보러온 클로디아를, 그가 미켈레를 알고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산드라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결국 모든 선택은 그녀 자신의 이익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한 두 입장의 만남은, 미켈레라는 인물을 집 밖으로 나가기도, 누군가가 밖에서 진입하기도 힘든,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의 좁은 방으로 밀어 넣었다. 

    또한, 두 사람은 항상 미켈레가 무언가를 원하거나 기다리고, 주장할 때마다 ‘나중에’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상 두 사람에게는 ‘나중에’가 없다. 상담원을 교육하는 산드라는 말이 많은 면접자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자벨라는 미켈레가 사라지거나, 시설에 있을 때 온당히 거쳐야 할 일의 진행을 기다리지 못한다. ‘나중에’가 없는 두 사람이 미켈레에게 말하는 ‘나중에’는, 미켈레에게 어떠한 해결방안도 주지 못한 채로 상황을 가라앉힌다. 이러한 일시적 상황의 종결은 미켈레가 아닌 두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며, 미켈레에 관한 문제를 그저 지연시키기만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태도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산드라가 회자 직원을 채용하기 전, 가상 면접을 보는 데에서 그 태도에 대한 현실적인 원인이 일부 드러나고 있다.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당장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효율성을 위해, 회사의 판매원은 진실을 전부 말하지 않고, 겉으로는 상대를 원하는 행세를 해야한다는 가르침. 이는 효율성과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현대 사회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힘겨워졌음을 은유적으로 지적한 것을 수도 있다.

    미켈레에게 약속한 ‘나중에’가 현실이 되는 순간은 이자벨라와 산드라가 미켈레의 생일 선물로 포르쉐 자동차 장난감을 선물할 때이다. 하지만 미켈레는 작년에도 이자벨라에게 같은 선물을 받았고, 올 해는 산드라와 이자벨라에게 동시에 똑같은 선물을 받는다. 미켈레에게는 사실상 세 개째 같은 선물이 쌓여가고 있다. 더불어 실제 자동차가 아닌, 실제 자동차를 꼭 닮은 작은 장난감 자동차는 '나중에'의 이미지적 은유를 주기도 한다. 연속해서 '해결인 체 하는 해결' 이 쌓여가며 같은 갈등과 문제의 양상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실질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산드라가 미켈레에게 준 '새 옷'과 같이 가족들이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니라, '미켈레가 원하는' 선물을 주었다는 데에서 미켈레가 느끼는 기쁨이다. 또한, 세 사람은, '미켈레가 원하는' 선물을 준 사건으로 인해, 그에게 같은 장난감 선물이 있다는 것을 드디어 인지하고는, 선물을 ‘바꾸러 가자’며 집 밖으로 나선다. 이처럼 나 자신이 아닌 상대를 향한 진정한 이해가 하나의 시작지점인 것이다. 집과 같이 좁은 사고의 틀 안에서 자기자신만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내놓는 '가짜 해결'을을 넘어설 시작지점. 

    작품은 결말부분에 실질적인 '문제의 종결'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구조상 완결된 이야기를 보여준다고는 할 수도 없다. 포르쉐 장난감을 교환하기 의해 밖으로 나가면 또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모른다. 하지만 장난감을 바꾸러 나가기 전, 서로를 꼭 안아주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은, 서로의 관계에서 잊고 있었으며, 앞으로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시작점', 서로에 대한 이해와 거기서 발행하는 사랑과 표용을 드러내며 뭉클한 정서를 유발한다.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그 다음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 주는 이미지는 가족이라는 소재가 줄 수 있는 정서적인 측면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문제의 완결이 아님에도 갑작스러운 '완결'의 느낌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작품은 미켈레를 사이에 둔 이자벨라와 산드라의 논쟁으로 이루어진다. 미켈레가 돈을 모아 아자벨라가 원하던 핸드백을 선물로 주는 장면, 산드라를 간절히 기다리고, 이자벨라가 힘들까 봐 일을 나가려는 장면 등은 미켈레가 진정 상대방을 위하고 있다는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는 산드라가 그를 보던 시선, 더 나아가 산드라와 같은 시선으로 그를 보던 관객의 태도를 재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이자벨라와 산드라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만, 미켈레가 보는 세상은 알기 힘들다.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비장애인과 다를 것 없는 의도, 또 종종 오히려 타인을 더 위할 줄 아는 선한 의도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서적으로는 전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나, 산드라의 머리를 자르고, 특수교사에게 지속적인 뽀뽀를 요구하는 등 실질적인 행동의 측면에서는 외부 세계와 온전한 소통이 가능할 것인지를 고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 고찰의 시선은 그의 외부에서 이루어진다. 아마 결말부에서야 이자벨라와 산드라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는 만큼 그 이전에 미켈레 내면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켈레의 입장을 들려다보는 것은 결말부 이후이고, 즉 공연을 본 이후 관객들이 극장 밖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미켈레에 대한 구체적인 들여다봄은 미완결이다. 

    극 중 미켈레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의 형상화인 이자벨라와 산드라의 갈등은, 극 중 표현된 미켈레와는 다르게, 미켈레를 사이에 두고 구체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말부까지 해결되는 것이 없다. 이자벨라의 입장에서, 미켈레는 자신과 산드라를 구하느라 큰 희생을 한 존재이고, 산드라 역시 이것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혼자 떠나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며 가난한 자신과는 다르게 비싼 옷을 고를 수 있는 처지가 된 산드라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산드라의 입장에서, 이는 자신의 선택과 욕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일 수도 있다.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 없는 인간에게 태어나기 전에 지켜진 목숨의 값에 대해 와 닿기란 힘들 수 있다. 더욱이 탄생 이후 실질적인 '살아감'에 있어서의 억울함과 서운함이 쌓여있는 인물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산드라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이자벨라는 없었고, 산드라는 이자벨라가 자신의 편이 되어준 적이 없다고 느낀다. 두 사람의 입장을 증오에 입각한 '납작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부여한 게 '가족의 사랑'이다. 이자벨라는 10년만에 돌아온 딸에게 '오랫동안 너를 찾아다녔고, 항상 길가에서 너를 본 것 같았다' 고 말하고, 싸우다가도 식사를 권하거나 걱정하고, 집에 들어가도 되냐는 딸에게 '여기는 언제나 네 집이었다'고 말한다. 산드라 역시 미켈레에게 행하는 모든 행위의 깊숙한 곳에는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엄마가 걱정되어서'라는 마음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어머니와 딸의 유대감인 것이다. 그렇게 작품은 극 전반에 정서적인 '찡함'과 함께 화해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결론부분에 다다를 때까지 두 입장은 서로에게 원하는 실질적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여전히 엄마가 명령을 내리고, 산드라의 입장은 물어보지 않는 집에, 산드라는 일방적으로 '미안하다'는 짧은 한 마디를 건네며 편입된다. 이 역시 어떻게 보면, 이자벨라와 삼드라가 미켈레에게 말하는 '나중에'와 같은 일시적 해결과 문제의 지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세 인물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은 가족이라는 소재가 주는 감성적인 뭉클함과 거기에 더해지는 따뜻한 음악과 속에 길게 노출되며 다소 신파적으로 관객의 눈물을 자극한다. 이는 공연의 가장 강렬한 부분으로 남아 다른 이성적인 생각들을 어느 정도 마비시킨다. 실질적으로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객석을 나가는 관각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로 그 본질이 가려진' 가상의 화해를 진실된 회해로 착각하게끔 한다. 거기에 더불어 화합을 뜻하는 '앙상블'이라는 제목은 작품이 대화합을 추구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관객의 '말랑해진' 정서와 결합되어, 극장 안에서 이 이야기가 온전히 완결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      

    

    연극  <앙상블>은 어쩌면 가장 근처에 있었지만 알아채지 못했을 이야기를, 가장 연극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은 일상적 공간 속에서 풀어간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보다 자신의 실제 삶과 연극의 논점들을 연결시킬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완결이 아님에도 마지막의 극적이고 급작스럽게 부여되는 정서적 완결성이 더 모순적이고 아쉽게 느껴진다. 가족애, 서로를 향한 통합과 포용에서 오는 따뜻함과 뭉클함은 분명 사회와 사람들 속의 겨울을 녹이고 봄이 오게 한다. 하지만 봄이 온다고 저절로 곡식이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봄이 주는 영양분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밭을 일구러 나가게 하려면, 즉 관객으로 하여금 객석을 나가서도 변화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려면,  단지 관객을 울게 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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