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37 아빠는 그런 인생을 살기로 선택한 거야.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들던 어느 날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쌀쌀함에 가을비가 더해져 추운 날이었다
늦은 출근을 하며 적적할 아빠한테 전화를 했었다(아쉽게도 몇 년 전의 통화 내용이다)
"따뜻하게 이불 덮고 낮잠 한 잠 주무셔.
난 이럴 때 따뜻하게 바람 막아주고 누울 곳 있는 집이 있는 게 너무 감사하고 좋더라."
아빠는 그까짓 게 뭐가 그렇게 좋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었다
아빠가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게 마음이 아팠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고 함께 여행 가는 행복을 아빠는 누리지 못했다.
그저 한 잔 술에 본인의 시름을 잊으면 그뿐인 사람이니까.
내가 성장하는 내내 온전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게 아쉬운 게 아니라, 이런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된 아빠가 안쓰러울 뿐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못한 아빠는 손주를 사랑할 줄도 모른다
가슴속 사랑의 꽃봉오리가 활짝 펴보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과 부대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직장동료는 자기가 보기엔 멘붕이 오는 상황인데 나보고 어쩜 그렇게 침착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본인보다 한참 어린 내가 대단하고 신기해 보인다고 했다
인생의 별의별, 쓴맛, 매운맛을 다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성이 생겼나 보다
남이 보기엔 큰일일 수 있어도 이까짓 거 알코올중독자 아빠 뒤치다꺼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생각하게 된다
그저 평온한 하루가 주어진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며칠 전 늦은 저녁에 내가 하루 중 꽤 긴 시간을 아빠 생각, 걱정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말 깜짝 놀랐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지 240일째.
그 시간 동안 내가 잠시 휴식할 수 있었던 덕분일까? 아빠로 인한 이벤트들이 요즘 뜸해서일까?
그동안 나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무의식중에도 항상 아빠와 함께 살았다
아빠가 술에 젖어든 만큼 내 인생도 함께 심해 어딘가로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숨쉬기에도 벅찬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 때면 도대체 아빠로 하여금 인생의 소중함을 얼마나 더 깨닫게 해주려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지?
나는 남은 생을 도대체 얼마나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씁쓸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요새는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아빠는 그런 아빠의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 거야
인생에는 참으로 작고 소중한 행복들이 많지만 아빠는 안타깝게도 알코올중독자의 인생을 살기로 선택했어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소중하게 가꿔나가면 되는 거야
나는 작고 소중한 일상으로 채워가는 인생을 선택했으니까
우린 각자 선택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