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42 아빠는 두 번째 퇴원 후 얼마나 견뎠을까?
1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강낭콩보다도 더 작던 배아가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탄생하기까지.
목도 못 가누던 갓난아기가 뒤집고, 기고, 서고 걷기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해내는 시간.
봄부터 겨울까지 아름다운 4계절이 한 바퀴 도는 시간.
늦잠 자고 싶은 날, 아파죽을 것 같은 날, 때려치우고 싶은 날의 마음들을 꾹꾹 누르며 버티다 보면 포상처럼 퇴직금이나 연차가 불어나는 인고의 시간.
새 학년, 진급, 입학, 졸업으로 새 이름표를 달 수 있는 수고와 기다림의 시간.
그 1년이란 시간이 아빠에게는 어떤 시간들이었을까?
아빠가 퇴원한 지 이튿날.
만 24시간을 채우지도 못한 채 아빠는 다시 술을 마셨다.
놀랍지는 않았다. 아빠가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기대 따위는 없었지만 그 소식을 들은 후 꽤 힘들고 두려운 시간들과 싸우다가 오늘 드디어 아빠를 보러 다녀왔다.
아빠는 꽃망울을 활짝 터트린 봄날이 무색하게 캄캄하고 서늘한 방에 홀로 잠들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안부 인사는 늘 넋두리, 푸념, 신세한탄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자식이라고 예뻐하고 힘들게 뒷바라지해 줬으나 끝까지 속만 썩이고 여전히 술독에 빠져있는 배은망덕한 아들을 향해 하염없이 원망을 쏟아내셨다. 저런 놈은 자기 목숨 스스로 끊을 줄도 모른다면서. (지난번에 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에는 그래도 아들이니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할머니는 어디서부터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며 본인의 고단한 칠십여 년 인생사를 들춰냈고 나는 간간이 추임새를 보탰다. 오랜만에 합석한 큰고모는 나에게 아빠에 대한 미련을 이제 내려놓으라 했다. 그게 나를 위한 길이라면서...
잠에서 깨어난 아빠가 부스스한 얼굴로 마당에 나와 나를 보고는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언뜻 보기에 퇴원했던 그날보다 나아진 얼굴이다.
할머니는 버스나 택시가 다니는 큰 길가에서 걸어서 족히 15분은 걸리는 시골길을 아들 먹이려고 고기며 게장이며 막걸리까지 무겁게 이고 지고 다니셨을 거다.
오늘 하루 종일 식사를 안 하셨다는 아빠가 요기할 수 있도록 얼른 국과 밥을 차려내었는데 국만 한 대접 후루룩 드실 뿐 밥은 손도 대지 않으셨다.(할머니 말씀으로는 그것도 내가 먹으라 하니 많이 먹은 편이란다.)
"아빠 방이나 청소해 주고 갈게" 하고 아빠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는데 비켜서있는 아빠의 까만 발을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멍이 들었나 했는데 슬리퍼를 신고 시골 논두렁을 걸어 슈퍼까지 셀 수 없이 왔다 갔다 했을 맨발에 때가 가득하다. 피부염인지 목둘레도 울긋불긋.
얼른 씻고 오라며 안채 화장실로 등을 떠밀어 갈아입을 옷가지들도 던져주었지만 아빠는 담배만 뻑뻑 피워댈 뿐 끝끝내 씻지 않았다.
독한 담배 연기로 누렇게 찌든 방 한 칸.
외로움에 지친 몸을 뉘일 1인용 이부자리와 낡은 옷장, 작은 티비가 전부인 그곳.
서랍 속 계절 없이 뒤섞인 홀아비의 옷 가지들을 정리하는데 한 없이 서글프다. 우리 아빠는 청바지를 좋아했구나. 아빠는 평생을 제대로 된 집. 편안한 방 한 칸, 푹신한 이불 한 채도 가져보지 못했구나.
팔순이 가까운 할머니는 이제 모든 살림이 힘에 부쳐 보이셨다.
측은지심
惻 : 슬퍼할 측
隱 : 근심할 은
之 : 의 지
心 : 마음 심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은 측은지심.
이제 더 이상의 미련도 분노도 내려놓고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기억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