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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추위 May 27. 2023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45 아빠 이건 하늘이 두 번 도운 거야.

아빠와 약을 타러 병원에 가는 날 아침.

어제저녁 아침 일찍 모시러 가겠노라 약속을 한 나는 비장하고도 분주하게 준비를 마쳤다. 아빠를 모시러 가면서도 고주망태가 되어 있진 않을까?

입을 꾹 닫고 "안 갈래" 시전을 하지 않을까? 출근까지 3시간 전인데 지각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빠는 지난밤에도 술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빠! 나 왔어. 병원 가자며~ 일어나 보세요"

겨우 몸을 일으켜서는 어제저녁 약속을 기억하는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일어날 테니 건넌방으로 가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있으란다. 몽롱하고 힘겨운 모습이다.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아빠 방에 건너갔더니 그제야 아빠 이부자리 옆 옷 무덤이 보인다. 아빠는 술을 드시고 간 밤에도 소변 실수를 하셨나 보다.

아빠는 술을 드시면 뇌경색이 후유증이 일시적으로 더 심해 보이는데 팔, 다리가 마비된 듯 뻣뻣하게 굳어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 듯했다


아빠는 쩔뚝거리면서도 양치질을 하고 시장표 가죽 신발을 챙겨 신고 단정하게 매무새를 만졌다.

아빠는  "그러지 말고 오늘 가서 입원이 가능하다고 하면 입원을 하자. 아빠가 술을 안 마시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래, 일단 가보고 입원할 수 있으면 밥 잘 먹고 거기 잘 들어앉아 있어." "에구. 네가 못난 아비 만나서 고생이 많다" 하신다


접수 데스크에 직원은 입원이 가능할지 물어보니 난색을 표했다

보통은 입원실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전화 문의를 하고 오기 때문이다. 지금 병실은 내부 공사 중이며 오늘이 화요일인데 만실이라 다음 주 목요일에나 자리가 날 것이고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으니 수시로 전화해서 입원 가능 여부를 문의해야 한단다. 대기도 걸어놓을 수 없고 병원 측에서 따로 안내도 안 해주니 그건 보호자의 몫이라고.


하는 수 없이 진료만 보고 가겠다고 말한 후 진료  순번이 되길 기다리면서 아빠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병원이 입원 받기를 꺼려 하는 환자인 건 아닌지 생각에 잠겼다.


작년에 아빠 주치의는 퇴사를 하시고 꽤 젊어 보이는 여자 의사를 만났다

퇴원 15일 후 외래진료가 있었는데 왜 오지 않았는지 한 달 반이나 지날 동안 술을 계속 드셨는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히 두었는지 나를 야단친다. 그러고는 아빠에게서 풍기는 지독한 담배 냄새와 술 냄새를 맡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사실은 입원하길 원했는데 병실이 없다더라 얘기하니 의사가 한 번 더 원무과로 전화해 확인을 한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정말 병실이 없긴 한가보다

항우울제, 항갈망제 등은 절대로 술을 드시면서 함께 먹어서는 안 되는 약이라고 했다. 이렇게 술을 드시는 상태에서 본인은 절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약을 처방해 줄 수는 없다면서.

며칠 마음고생해가며 병원을 힘들게 찾은 게 허무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일주일 치라도 약을 주실  수 없냐고 애원했으나 의사는 단호히 안된다고 했다.

아빠는 약물복용보다 하루빨리 해독을 하는 게 우선이니 응급실로 가서 수액을 맞든 다른 병원을 찾아가 입원이라도 하라고 포스트잇에 병원 이름 하나를 써 나에게 건넨다.

술이 깨는 과정에서 많은 알코올중독자들이 죽는단다. 아빠의 알중 친구도 몇 해 전 그렇게 할머니 집에 며칠을 기거하다 멀쩡히 아침을 먹고 급사했다. 아빠가 직접 심폐소생술을 했다고도 들었으나 병원으로 옮긴 후 며칠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별이 되었다고 했다.


허무하게 단 하루치의 약과 포스트잇 한 장을 손에 들고 지끈지끈 묵직한 두통과 허탈함과 막연함을 마주한다

아빠는 몇 번이고 약은 왜 이것뿐이고 왜 입원이 안 되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아빠의 사고는 고령의 노인과 닮아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재차 상황 설명을 해드렸다


아빠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출근해도 총알같이 달려야 지각을 면할 것 같다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 신호를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병원! 왜 전화를 한 거지?


"보호자님! 지금 멀리까지 가셨나요? 원무과장님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십니다. 다시 들어오실 수 있나요?"


"아빠 병원에서 다시 와보라는데? 혹시 입원 받아 주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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