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많은 사람이 특별해지고 싶은 것은 슬프고 힘든 일이다
목차
1. 창업에 대한 나만의 견해가 자리 잡혔다.
2. 겁이 많은 사람이 특별해지고 싶은 것은 슬프고 힘든 일이다.
3. 다시 한 번,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4. '시간'이란 가치를 우습게 여기지 말자
5. 안일함을 부드러움으로 포장하지 말자
지난 1년 간, 매 달마다 월 회고를 기록했다. 연간 회고를 위해 그동안 쓴 회고록을 돌아보니, 창업과 관련해 나만의 생각과 견해가 확립이 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생각한 창업은 무엇이고, 창업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등이 지난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창업과 사업은 다를 바가 없다. ( https://brunch.co.kr/@famelee/123 )
시장의 크기는 창업가가 그리는 미래의 크기다. ( https://brunch.co.kr/@famelee/136 )
사업의 핵심은 잘 만드는 놈이 되는 것이다. ( https://brunch.co.kr/@famelee/134 )
창업을 지속하기 위해선 고객의 가치, 시장의 크기, 문제를 향한 신념 3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 https://brunch.co.kr/@famelee/138 )
좋은 서비스와 옳은 서비스는 다르다. 즉, 고객과 비즈니스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서비스에 접근해야 한다. ( https://brunch.co.kr/@famelee/115 )
회고록을 돌아보니 창업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함께 커져가는 게 보였다. 23년 초와 말에 쓴 회고록에서 내 감정 상태가 크게 변한 걸 볼 수 있었다. 연초의 회고록에는 창업이 즐겁고, 힘들지만 버텨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연말로 갈수록 불안감이 커져가고, 이를 어떻게든 다잡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큰 느낌을 받았다.
회고록을 복기하며, 나는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불안정한 상황은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설령, 심기가 굳고 강인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만, 강인한 사람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잡고 올인을 한다. 반대로,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실패할 생각에 다음 플랜을 먼저 생각한다. 나는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웠다.
올해로 29살이 됐고, 내년이면 30살이다. 20대 중반만 해도, 30살의 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으리란 기대를 했다. 하지만 1년이 남은 시점에서 볼 때, "특별함"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특별한 사람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특별함을 추구하는 건 힘들고 어려우며 이상적이지만, 평범함을 추구하는 건 안정적이고 편하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겁이 많은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한 욕망은 저주가 아닐까? 특별해지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올인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겁이 많은 사람에게 이 과정은 힘들고 어렵다. 물론,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겁이 많다”라는 말은 “위험에 민감하고 사전에 준비한다”로 해석이 될 수 있다. 다만, 스스로가 이런 성향을 가졌다는 게 슬프다. 24년은 겁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창업을 시작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의 삶에 침투한 서비스를 만듦으로써 '나'의 존재성을 증명하고 싶었다. 실제로, 신촌 스타벅스에서 내가 만든 서비스를 사용하는 분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밀려온 희열은 엄청났었다. 하지만 처음의 포부와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의 목적은 머릿속에서 휘발됐고 관성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어제 디즈니 신작, 위시(wish)를 봤다. 마치 영화는 꿈을 잊은 사람들에게 "네가 잊었던 꿈은 뭐야?"라고 묻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를 본 후에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고민이 들었고, 내가 창업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한번 돌아봤다. 30살의 나는 어떤 삶을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시 복기한 미션과 비전을 어느 정도는 이뤘으면 좋겠다.
미션 :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입증한다.
비전 :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든 서비스를 내 힘으로 만든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볼 때, 내 가장 큰 패착은 2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간이란 가치를 가볍게 여긴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며, 다양한 기준을 고려해 결정을 내린다. 이때 나이가 젊을수록, '시간'이란 기준은 크게 와닿지 않으며, 그저 즐거움, 재미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은 실패해도 큰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여긴다. 적어도 나는 그랬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 1년 후에 실패로 끝났을 때,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러한 경험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밑거름은 정말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같은 기간 동안에 다른 선택을 내린 게 더 옳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구심이 꼬리를 문 순간, 과거에 '시간'이란 가치를 너무 우습게 여겼으며, 안타깝고 귀한 시간을 낭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과거의 시간 낭비가 앞으로의 나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1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한테 바라는 기준은 다르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났기에 사회는 더 높은 기준을 나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과거에 시간을 낭비했기에 기준점과 현재 내 위치 사이의 격차는 더욱 넓어졌다.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더욱 없어지게 된다.
두 번째 패착은 안일함을 부드러움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듣는 편이며, 나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의사결정권을 위임한다. 이러한 방식이 내가 잘 모르는 영역에서 더 올바른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모든지 과하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내 의견을 밀고 나가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했었다. 예를 들어, 어떠한 문제를 푸는 데 있어 "현재는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라는 팀원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우리는 더 해야 해"라고 말하기보다 "그 정도로 만족하다"라는 식으로 끝을 냈다. 혹은, 프로젝트의 데드라인을 설정하는 데 "그건 일정이 불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팀원의 말에 "그래? 그러면 기간을 더 늘리자"라는 식으로 답했다.
돌이켜보면, 내 의견 수용은 '비판적 수용'보다 '맹목적 수용'에 가까운 것 같다. "나보다 더 많이 알지만, 이건 아닌 거 같아"라고 생각하기보다 "나보다 더 많이 아니깐, 무조건 맞겠지"라고 생각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즉, 안일하게 받아들였기에 주어진 시간 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기회를 잃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