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마다 다른 시간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3)

by 완서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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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씨를 심은 지 열흘째. 흰무는 이랑의 절반쯤에서 여전히 싹을 내지 않는다. 혹시 너무 깊게 심은 건 아닐까 싶어 그 부분만 다시 씨를 뿌렸다. 오래된 씨앗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래디시는 달랐다. 오래된 씨앗이었는데도 신기하게, 뿌린 자리마다 어김없이 싹을 틔웠다. 밤톨만 한, 혹은 짧고 뭉툭한 모양의 빨간 무는 씨를 뿌린 지 스무 날이면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스무 날 무’라는 뜻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아침 햇살을 받아 무싹들이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그 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내 곁에도 번져 오는 듯하다. 물론 언젠가는 내가 뽑아 먹게 될 무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싹이 전해주는 맑은 기운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그저 싹이 돋아나는 땅일 뿐이다. 뽑아 먹게 될 무와, 그 무가 전해주는 고요한 기운이 함께 있는 땅.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싹을 틔우고, 스러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돋아나기를 거듭하는 땅.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이 텃밭도 그렇다. 바라보는 눈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 아니, 때로는 지옥이면서도 천국이고, 천국이면서도 지옥처럼 겹쳐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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