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차 교사인 나는 올해 지역 만기라 타지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전입 가는 학교에서 부장교사를 맡게 되었다. 우리 학교 전입자 중 내가 유일하게 학년부장 타이틀을 달았다.
"어므나~ 교감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전입 왔는데 학교가 너~무 좋아 보여요. 와, 근데 교감선생님 인상도 좋으신 걸 보니 저는 정말 복 받았나 봐요~ 호호 잘 부탁드립니다~!!!
바로 나의 이 인사 덕분(?)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는 의욕에 가득 차서 밝게 인사하는 나를 보고 부장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 큰 사람이다. 어떤 선생님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4~5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길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시는데 나는 스트레스보다 기대와 설렘이 더 컸다. 여기서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또 얼마나 좋은 인연이 될까? 하는 기대감이랄까.
부장교사를 맡았지만 부담감이나 긴장감 하나 없이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인정욕구가 강한 나는 일을 하고, 거기에서 오는 성취감과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지난 12년간의 교직생활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장교사로 일하면 일반 교사보다 조금이나마 더 이동 점수를 받을 수 있어 3년 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는 부장을 해야만 했다.
아무튼 행복지수 100으로 시작한 나의 학교 생활은 점점 부담과 압박, 스트레스로 변해갔다. 학년 교육과정을 비롯해 공모사업 등 업무가 생각보다 많았고, 이 학교는 유난히 다른 학교보다 행사가 많은 학교라 쉴 틈이 없었다. 3월 내내 저녁 8시까지 일을 하고, 동학년 선생님 6명과(한 학년에 7반, 전체 40 학급이 넘는 큰 학교다.) 학년 소속 전담선생님 2명의 의견을 계속 수합하고, 제출해야 했다.
전 학교에서 그 힘들다는 방과후부장, 돌봄 업무를 할 때에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업무부장은 내 업무만 처리하면 되었는데 학년부장을 하니 학년의 업무를 하고, 교육과정을 짜고, 우리 반 아이들 수업 준비도 하고, 학생 상담과 학부모 상담도 하려니 시간이 부족해서 정시에 퇴근할 수가 없었다. 근무시간을 벗어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심지어는 주말과 공휴일까지 이어지는 학부모 전화와 문자도 스트레스였다.
그러다 5월에는 아들이 다리를 다쳐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퇴근 후에는 병원에 데리고 다녔다.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도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업무를 할 때도 있었다. 점점 나의 워라밸이 깨지면서 불안해졌다.
1학기의 마지막 날, 방학식을 하는 날 아침. 나는 온몸이 아프고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도저히 학교를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안 가면 우리 반 애들은 어떡하지? 우리 학년 선생님들한테 피해를 주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집에서 코로나 자가키트 검사를 했는데 음성이 나와서 감기몸살인가 보다.. 하고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수업을 하고,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 조퇴를 했다.
집에서 끙끙 앓다가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저녁에 병원에 가니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지금은 격리가 의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맙소사.. 방학식날 코로나에 걸린 불운의 교사가 내가 되다니! 게다가 아들도 같이 확진되어 나는 내 병간호도, 아들 병간호도 해야 했다.
코로나에서 회복되기까지도 한참 걸렸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마음의 불안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중에 나이 들어 아들이 출가하면 나,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확 밀려왔다. 지금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아들인데, 학교에서 힘들어도 아들을 보고 힘을 내는데 이 아이가 커서 자기 삶을 살게 되면 나는 어떤 행복으로 살지?
이러한 불안이 시작되자 갑자기 불면증이 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을 잘 자던 나는 일주일 동안 새벽 2시에도 4시에도 눈이 떠졌다. 말수가 적어지고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뉴스에서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아, 교권이 이렇게 추락했구나.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직업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구나.. 내 마음은 더, 더 가라앉았다.
토요일에 서울에서 집회가 열린다고 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안에 사는 발령 동기 언니한테 연락했더니 언니도 간다며 서울 집회에 갈 때 너무 더우니 물, 돗자리, 모자를 꼭 챙겨 오라고 했다. 카톡으로 따뜻하게 챙겨주는 언니에게 너무 고맙고 든든했다.
그리고 2주간 집회에 참여하면서 나는 펑펑 울기도 하고, 교권 회복에 대한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처음 보는 옆자리 선배 선생님이 부채를 내 쪽으로 부쳐주시는데 울컥하고 뭉클한 감사의 마음이 뜨겁게 차올랐다. 아.. 역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내 안에서 희망의 빛이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나 서울에 갑자기 오게 되었는데 혹시 오늘 저녁에 잠깐 볼 수 있을까?"
집회에 참여하러 서울에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서울에 사는 친한 고등학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너무 갑작스러우니 바쁘면 다음에 봐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다. 당일 약속은 아무래도 힘드니까.. 그런데 바로 답장이 왔다.
"안 그래도 기사 봤어! 날도 더운데ㅜ 완전 응원해!!! 집회 끝나는 시간 맞춰서 밥 사주고 내려보낼래."
거절당할까 봐 미리 괜찮다는 카톡을 보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친구에게 너무 고마웠다.
점심도 못 먹고 4시까지 집회에 참여하고 온 나에게 친구는 따뜻한 오므라이스와 돈까스, 명란파스타까지 메뉴를 세 개나 시켜주었다. 고맙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감동이었다.
오늘 아침,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와 놀러 가고 나 혼자 일요일의 시작을 어떻게 열까, 하다가 얼굴에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챙겨 우리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원래 걷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 시간 거리도 자주 걸어 다녔는데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좀처럼 걸을 일이 없었다. 아, 이것도 내가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겠구나.
오전 9시 반. 주말 아침 이른 시간이라 한적한 카페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햄 루꼴라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진다.
2년 전, 청주에서 나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인 제주도로 전출 가신 선배 언니가 서울 집회 잘 다녀오라고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주신 쿠폰으로 먹는 아침식사라 더 맛있게 느껴졌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70대 유튜버 밀라논나 님의 책 제목이다. 와.. 어떻게 이런 제목을 지으셨을까? 제목만 봐도 치유되는 느낌이다.
처음 읽었을 때도, 두 번째 읽었을 때도 좋았는데 세 번째 읽어도 너무 좋다. 무엇보다 중년에서부터 노년의 삶을 걱정하는 나에게 현명한 인생선배가 내 옆에서 해주는 따뜻한 조언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출처: 도서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사는 게 뭐 별것일까.
태어나졌으면 열심히 사는 거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살면 좋고.
내 몫을 책임져주지 않을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두지 말고.
이렇게 심플하고 멋진 삶의 정의가 있을까?
감동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데
지잉 -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나이는 나와 띠동갑 이상 차이가 나지만 언제 만나서 대화해도 늘 유쾌하고 즐거운 선배 언니가 내가 서울에 다녀와서 바꾼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쿠폰을 보내주신 거다.
내가 스타벅스에 있는 걸 어떻게 아시고 보내셨지? 너무 신기하고 감사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지금 네가 힘든 건 네가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래. 학교 일에 힘 좀 빼~ 그래도 괜찮아."
언니와 전화 통화하며 나에게 해준 말들에 내가 어찌나 위로를 받았던지..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혼자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괴로워하지만, 결국 사람으로부터 가장 큰 위안과 치유를 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는 못 봐도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람은 모두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