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듣기를 연습하기로 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겠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내가 말이 많아진다는 것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못 기다리고 끼어들었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상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가려 하자 나는 내 목소리를 더 높여서 큰 목소리로 말을 끝마쳐버렸다. 관심이 많았던 주제였던 터라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이야기하던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내 말을 그저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대화를 끝내고 든 기분은 창피함이었다.
또 한 번은 여럿이 모여서 근황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국의 이야기처럼 나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내가 직장에서 최근에 겪은 일을 말하게 되었다. 말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흥이 올랐다. 언제 일어난 일인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이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 등등을 한참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살피는데, 아뿔싸. 누군가의 눈빛은 창밖을 향하고, 옆의 사람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다른 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눈치 없이 떠들어대던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리고 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지고 하고 경험도 많아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아는 이 좋은 걸 상대도 꼭 알아야 할 것 같아 입이 근질거린다. 상대는 자신보다 연장자인 (또는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이야기를 강제로 멈출 수 없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기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내가 정말 싫어했던 어른이 되어간다.......
고등학생 때 모의고사의 시작은 항상 국어 듣기 평가였다. 외국어 듣기 평가도 아니고 국어 듣기 평가를 왜 하는지 알 수가 없다며 항상 투덜대곤 했다. 국어 듣기 문제는 그렇게 어렵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들으면 틀리게 되는 성가신 문제였다. 운이 좋을 때는 다 맞고 종종 몇 개씩 틀렸다. 사실 듣는 걸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딱히 없었다. 나에게 듣기는 그냥 귀가 두 개 있고 뚫려 있으니 자연히 일어나게 되는 그런 행위였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훌쩍 지난 지금의 나는 국어 듣기를 기초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판이다.
하재영의 자전적 에세이집 <친애하는 나의 집>에서 저자는 자신의 남편을 이렇게 소개한다. ‘범준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잘 듣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그 이야기가 연상시키는 자신의 이야기에 골몰하거나, 완전히 상관없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귀하고 드문 태도를 가진 셈이었다.’ 뜨끔했다. 나는 잘 듣는 사람인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 나는 얼마나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나. 친구의 슬픔을 들으며 나의 위안으로 삼은적은 없었나. 가족의 고민을 들으며 오늘 저녁거리를 상상한 적은 결코 없었나.
학생 때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던 국어 듣기 평가를 이제라도 연습할 생각이다. 대화 전 핸드폰은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둔다. 몸을 틀어 앉고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이야기를 경청한다. 여기서 경청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감각세포와 온 마음을 대화하는 그 사람에게 쏟는다는 뜻이다. 그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음 중 화자가 말한 내용이 아닌 것은?), 어떤 생각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화자의 의도는?), 내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대화 끝에 이어질 알맞은 상대의 반응은?) 등등을 생각하며 듣는다. 열심히 듣기 훈련을 하다 보면 실전 듣기 문제를 다 맞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추가로 나의 수다스러운 입을 조금은 멈출 수 있겠지. 쓰다 보니 글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