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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Nov 23. 2024

열일곱 번째 일기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병행한다


열일곱 번째 일기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병행한다. 수십억 년의 시간을 철저하게 감추고 홀로 역사를 간직한 우주를 생각하다 보면, 행성이든 항성이든 위성이든 저마다 하나의 생물체 혹은 생태계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까 지구도 어쩌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 사실은 아주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삼 초에 한 번 호흡을 할 때 지구는 오 년에 한 번, 십 년에 한 번씩 호흡을 하느라 전혀 느끼지 못할 뿐일지도.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지구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증식하는 암세포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많은 인간이 군집하여 살아가는 구역은, 지구 입장에서 커다란 종양인 것이다. 그것도 심각한 악성. 그러나 지구는 매우 느리고 둔하고 고요한 나머지 지금까지 제 몸속에 있는 암덩어리를 제거하지 못했다. 아니면 이미 서서히 제거되는 중인데, 그 역시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인간이 일 초에 사백 미터 넘게 회전하는 지구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중력이 있어서이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지구가 중력을 포기하는 순간 벌어질 끔찍한 사태를 상상한다. 모든 건물이 박살 나고 바다가 뒤집히고 땅 위에 있던 생물들이 모두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그렇게 인류가 순식간에 멸망하는 것이다. 인간과 생명체가 사라진 지구는 부서지지 않는다. 수천만 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생물이 탄생하여 다시 한 역사가 시작될 테지.


지금 이 시대가 완전히 저문 후 나타날 지구의 모습이 궁금하다. 어쩌면 지금 인류는 지구를 백 번째 사는 종족일지도 모른다. 맨틀 어딘가에는 인간이 상상하지도 못한 지구의 과거가 은밀하게 숨어 있을지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행성은 수수께끼가 아주 많다. 다만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이르고, 또한 인간은 멍청하다. 지구의 과거가 어찌 되었든 지금 내 삶이 변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나 역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며 산다. 그렇게 가정해 보았다. 하루에도 수십 바퀴를 돈다. 스스로 돌면서 또 무언가의 주변을 반복해서 돈다. 빙글빙글 도는 동안 사람을 만난다. 많은 사람을 만난다. 기억에 제대로 남는 사람은 없다. 열심히 돌지만 여전히 사랑은 시작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계량한 고기를 먹고 화분을 사고 책을 사 읽고 가끔 영화를 본다.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돌면서 살고 있을까. 그래서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걸까. 인간의 마음에는 어째서 외로움이나 불안이나 결핍이나 걱정이나 우울 따위가 생겨났을까. 그 또한 신의 뜻이라면 나는 그의 뜻을 정말 모르겠다. 정말 미쳐버릴 정도로 전혀 모르겠다! 태초의 지구 ― 라고 우리가 믿는 것 ― 의 존재처럼 신의 존재, 혹은 그의 전지전능한 뜻도 전혀 알 필요가 없다. 나는 침대에 웅크려 누워서도 계속 돈다. 가끔은 진짜 내 몸이 허공에 떠올라서 천천히 도는 것처럼 어지럽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나의 몸은 침대에 그대로 있고, 천장은 붙박이별처럼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치면 잽싸게 몸을 돌린다. 다시 그렇게 눈을 감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도는 것 같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제각기 다른 길을 다른 속도로 도느라 좀처럼 만나지를 않고, 나의 몸과 머리와 마음은 분리된 것처럼 따로 놀아서 자꾸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고정된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 의식의 소유자가 나 자신이 아닌 기분, 나 자신의 존재가 낯설고 내 몸을 움직이는 게 가장 어렵고 내 마음을 인지하는 데에 가장 소극적인 행위. 그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어쩌면 애초부터 나는 의식과 육체가 제대로 일치하지 않는 인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따금 죽기 전까지 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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