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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유 Feb 16. 2023

흰색에 관하여

알베르티 / 뉴턴 / 한강 / 시오타 치하루 / 말레비치 / 라우센버그

Ⅰ. 흰색의 의미를 중심으로


1. 연구 배경

화가는 흰색을 귀금속보다도 더 값비싸게 여겨야 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서 마셨다는 진주알을 물감의 재료로 삼아서 흰색과 검은색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 흰색과 검은색을 아껴 쓰면 쓸수록, 그림은 진실에 더 가깝고 우아하게 완성될 것입니다.(알베르티, 회화론, 기파랑, 2011, 167쪽)


그가 말하고 있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알베르티보다 약 150년 뒤에 활동했던 뉴턴의 말에서 힌트를 얻고 연구를 이어나갔다.


2. 하양의 역설

뉴턴은 하양의 역설을 발견했다. 하양은 색으로 가득한 동시에 색이 없다. 빛의 영역에서 하양은 모든 색채의 총합이지만, 물질의 영역에서는 어떤 색채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양은 색의 ‘파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제임스 폭스, 컬러의 시간, 윌북, 2022, 212쪽)


흰색은 더하면 더할수록 원래 색의 선명함이 사라지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부터 색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눈송이가 아무리 희다고 해도 자연 속에 색이 없는 물체는 없기에, 현실의 재현을 중요시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경향과 어긋남을 알 수 있다. 


3. 비어 있는 것으로서의 흰색

3-1 서양의 예

흰색을 색의 부재, 즉 무색과 혼동하게 된 것은 인쇄술의 영향이 크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나무의 흰 속살을 활용한 종이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없는 곳에는 흰색 종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관해 프랑스에서는 page blanche(흰 종이)를 ‘내용 없음’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 


3-2 동양의 예

반면 동양에서의 흰 여백은 때에 따라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배경인 동시에 주체가 되기도 한다. 여백은 먹과 물의 농담과 잘 어우러지며 사고의 흔적으로 남겨진다. 수묵화에서는 종이나 비단 같은 원래의 백색을 그대로 남겨두거나, 먹과 물을 묻힌 붓끝의 갈라짐과 함께 흰색을 표현한다. 


4. 보다 일반적인 흰색의 의미

일반적인 흰색의 의미에는 긍정적인 것이 많다. 순수함, 깨끗함, 단순함, 숭고 등이 있다. 한국어로 ‘희다’라는 말은 중세 국어로 해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었으며 ‘태양의 밝고 환한 빛’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태양은 인간이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기에 고대부터 태양을 숭배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의 색 체계에서는 빨강, 검정과 함께 흰색이 세 가지 기본색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이다. 


5. 한국인과 흰색

한국인은 특히 고대 중국 문헌 <위지>, <동이전>에 기록될 정도로 흰옷을 일상복으로 입었다. “신라인이 백색 옷을 숭상하였다.”하여 백의민족이라 불리기도 했다. 특히 죽은 자의 영혼이 좋은 세계에서 영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상복을 흰색으로 입는 전통적인 관행 또한 있었다. 조선을 예로 들더라도 백자와 흰색의 모시 조각보, 일반인의 흰색 누비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백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임태훈, 황성걸, 화이트 컬러의 연구 추이 및 기회 분석, 한국과학예술융합학회, 2016 25(), 369-378쪽)





Ⅱ. 흰색을 활용한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1. 한강(1970~), 흰

1-1 순수함

<달떡> 달떡같이 희다는 게 뭘까, 궁금해하다가 일곱 살 무렵 송편을 빚으며 문득 깨달았다. 새하얀 쌀 반죽을 반죽해 제각각 반달 모양으로 빚어놓은, 아직 찌지 않은 달떡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곱다는 것을.(한강, 흰, 문학동네, 2016, 22쪽)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위의 책 80쪽)


1-2 죽음

<재> 어머니의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은 납골당에, 혼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작은 절에 모셨다. ... 그 빛과 소리들 가까이, 어머니의 재는 돌로 된 서랍 속에서 변함없이 고요할 것이다.(위의 책 66쪽)

<수의>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위의 책 120쪽)


2.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 1972-), In Memory

“나에게 기억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기억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큰 배 위에 얹힌 옷의 외피와 같이, 우리는 기억의 바다에서 영원히 방황하고 있다.”(브리크 기사, 자료: 가나아트, 에디터: 김지아)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실 작업을 해온 그녀는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흰색 실타래를 엮는 신작을 만들었다. 낳자마자 아이를 잃은 소설 속 어머니와, 뜻하지 않게 유산을 해야 했던 작가의 경험이 합쳐져 감동을 받았다 한다. 또한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공포, 두 번의 암 투병으로 겪은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작품 중앙에 놓인 흰 배와 흰옷에 투영되었다. 

배는 기억을 부유하는 오브제이고, 옷은 두 번째 피부와도 같은 존재의 연장을 상징한다. 그녀는 흰색을 통해 삶 속에서 마주한 아픔과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의지와 숭고미를 발견할 수 있다.


3.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White on White

그는 인간의 경험이나 인식이 갇혀 있지 않고,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성에 파고들었다. 그에게 있어 초월성이란 비물직적이므로 감각의 차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고, 그 무(無)는 회화에서 비어있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그는 또한 “종교와 예술은 더럽고 탐욕스러운 물질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흰색이라는 상징적인 색을 사용해 그림에 담긴 의미를 극대화했다. (이규영, В. 칸딘스키와 К. 말레비치 회화의 초월성: 정신사적 관점에서의 초월성과 종교성, 한국연구재단, 2017, 2쪽)


4.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White Painting

White Painting은 흰색 페인트로 캔버스를 균일하게 덮은 페인팅 작업입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사이 톰블리(1928-2011)와 협업해 “순결한 결백”을 나타내는 거대한 흰 캔버스를 제작했다. 모든 손의 흔적을 제거하고,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을 순수한 물질인 흰 캔버스로 축소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항상 화이트 페인팅을 수동적이지 않을뿐더러, 매우 섬세한 작품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림자에 의해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 또는 하루 중의 몇 시인지 알 수 있었다.”그들에게 흰색 페인트로 덮은 캔버스는 신을 나타내는 지표로써, 가능성이 넘치고 무엇이든 이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활용된다. (조유진,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작업의 네오아방가르드적 실천 : <화이트 페인팅 White Painting>(1951) 연작을 중심으로, 2019,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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