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 속엔 연필보다 걱정이 더 많다
5시, 알람이 울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유산균 한 포를 먹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멍하니 있던 내 시선 끝에 아들의 학교 가방이 들어왔다. 가방 속에서 필통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문득 아들의 가방이 보고 싶어졌다.
‘쓰레기장 그 자체’라 불리는 아들들의 가방. 남들이 똘똘하다 칭찬하는 내 아들의 가방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양치 파우치와 함께 들어 있는 줄넘기,
언제 넣은 건지 모를 말라버린 물티슈 한 장,
짝꿍이 사라진 사인펜 뚜껑,
친구 이름이 적힌 색연필,
표지가 찢어지기 직전인 알림장,
각종 쓰레기들(이라 쓰지만, 아들은 분명 필요한 것들이라 주장하겠지),
그리고 심이 다 닳은 연필 두 자루가 들어 있는 필통까지.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을까 싶을 정도로 혼돈이었다.
알림장 표지는 테이프로 덧붙여 보수하고, 쓰레기들은 버리고, 양치 파우치와 줄넘기는 따로 구분해 넣어두었다.
자, 그다음은 필통.
분명 3월에 연필 다섯 자루를 넣어줬는데, 세 자루는 어디로 간 걸까. 지우개가 그대로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친구의 색연필을 넣어 두고, 닳은 연필 두 자루를 깎았다. 그리고 새 연필 세 자루를 더 넣어주었다.
아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하지만, 학부모로서 그 궁금함의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는 게 참 어렵다.
교사이자 학부모인 나는 늘 고민한다.
‘어느 정도까지 궁금해야 하나.’
아이에게는 교사이기 이전에 엄마이기에 이런 상황이 궁금하고, 아이에게 물어도 의문인 점은 학교에 문의하거나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직업을 가진 이로서, '이유가 있겠지, 그럴 만하겠지.' 하고 넘어가는 일이 더 많다.(사실 ‘그럴 만했겠지’ 하는 게 대부분 정답이긴 했다.)
아이의 가방을 보며 아이의 학교생활을 짐작하게 된다.
자리에 잘 앉아 있을까,
선생님 말씀에 끼어들지는 않을까,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학교에서 생길 수 있는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알기에 아들이 그런 일에 휘말리진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지난주, 아들이 참여하고 있는 한자 방과 후 수업의 공개수업에 다녀왔다. 10년째 내 수업을 공개해 왔지만,
남의 공개수업을 보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은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며, 책을 번갈아 보다가 대답도 곧잘 했다.
문득 전날 있었던 나의 학부모 공개수업이 떠올랐다. 교사 입장에서는 공개수업이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 학부모로서 참여하며 깨달았다. 물론 교사가 공개수업에 책임감을 가지고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학부모가 보는 것은 ‘교사’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의 뒷모습’이었다.
나의 학부모들은 수업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잘 앉아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이가 수업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내 수업이 어땠다는 평가보다, 아이의 모습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나 역시 아들의 공개수업에서 바라본 것은 그저 아이의 뒷모습이었다. 며칠 전 필통과 가방을 보며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안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마음먹었다. 필통과 가방으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재단하지 않아야겠다. 그 뒷모습을 보며 묵묵히 응원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내 교실 속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에도 함께 응원을 보내야겠다.
(그런데 이런 결심 하루 만에, 아들이 놀이터에서 놀다 친구를 다치게 했다. 역시 결심이란 건 이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다.)